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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기 Aug 16. 2021

부부의 세계

부부. 서로 마주 보며 사랑하는 아름다운 이름이 되려면?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져’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저 너머의 이상을 꿈꾸며, ‘사랑으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리라’ 다짐을 곁들이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부부가 되지 않았던가?

  나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로맨틱한 사랑이 일상이 되고 보니 아름다웠던 우리의 사랑은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서서히 그가 원망의 대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회식은 왜 이렇게 자주 하는 건지, 늦게 와서 왜 씻지 않고 자는 건지, 시댁은 왜 자꾸 간섭하는 건지, 육아는 왜 항상 내 몫이어야 하는지 등등.     

 젊은 시절의 나는 ‘왜 기어이 결혼하려고 했는가?’ 자문을 하였다면, 결혼생활 20년이 된 지금은 ‘웬수라 칭할 만큼 감정의 끝을 달리면서도 왜 서로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일까?’를 묻고 있다.      


  27살. 나는 그가 마지막 사랑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결혼을 결심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완벽하게 보였던 그가 결함이 있는, 아니 많은 인간이라는 것, 그 평범한 진리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남편도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집안일을 넘기면서도 그것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남편,

 여성성은 사라지고 중성으로 변해가며 시시콜콜 잔소리가 많아진 아내.

 젊은 부부였던 우리는 말다툼을 하게 되면 과거의 일까지 소환해 와 자기의 입장을 하소연하기 바빴다. 자기를 이해해 달라 외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방의 결점과 아픔을 파헤치며 더욱더 상처를 주기 십상이었다.      


 인생사를 다 이해할 나이는 아니지만, 이제와 되돌아보면 우리 부부의 말다툼은 싸움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말다툼을 통해 서로가 일상에서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를 알아갔으며 그래서 상대에게 더 세심하게 관심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랬기에 남편이 사기를 당해 위기 상황에 부딪혔을 때 그에게 극악스럽게 악다구니를 쓰다가도 결국은 등을 도닥거리고 어깨를 빌려주며 함께 고생도 하게 되더라.


 내 삶의 영역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랴. 각자 삶의 몫에서 승화되어 가족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은 양보와 희생이 필요하지 않던가. 신혼 초기 자신의 희생 봉사를 나열하며 너도 좀 더 하라고, 똑바로 살라고 하지만 사실 서로의 말은 이 세상에서 당신만 나를 이해해 주면 되는, 그만큼 당신은 나에게 중요한 사람임을 표현하고 있었던 듯싶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연인이자 친구가 되고 있다.

여전히 우유부단하고 오지랖 넓어 남 일에 더 바쁘지만 그래도 편하게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변덕쟁이고 삐딱한 내 성질을 이해해 주고받아주는 유일한 사람,     

오직 그것은 20년을 같이 살고 있는 ‘당신만이’ 가능한 일이란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요즘이다.     


  철학자  바디우는 사랑을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의 ‘마주 봄’이라고 했다.

‘하나’가 되기 위해 나 아니면 네가 희생하고, 콤플렉스와 투사로 상대방을 재단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이제 나는 성숙된 인간으로 서로 마주 봄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본다.      

삶도 사랑도 성숙한 ‘내가’ 있어야 깊어지나 보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성찰의 자세를 가진 ‘나’가 전제되어야 성장이 될 수 있나 보다.

그래야 진정으로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으니.

그래야 진정으로 사랑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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