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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기 Jul 03. 2022

먹방을 보며

 나는 어릴 때 매우 허약했다. 감기는 늘 달고 살았고 초중학교 시절에는 결석도 잦았다.  

그러나 나의 급격한 무게 성장은 중 3 때부터 시작되었다. 중 3은 내 생애 가장 암흑기였다.  촌지를 밝히는 담임선생님을 둔 가난한 반장이었던 나는 매일 교무실에서나 교실에서 혼나기 일쑤였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원만하지 못했다. 부모님께는 속마음을 전달하지 못해 끙끙 앓았고, 일기를 쓰며 울다 잠든 시기였다. 그 시기 나를 가장 위로해 주었던 것은 바로 ‘음식’이었다. 매일 아침 따뜻하고 정성이 담긴 엄마의 집밥을 한 입 가득 넣을 때는 속상한 하루를 그런대로 버텨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 3 졸업식 때 세련된 이모부가 시내 경양식집에 데려가서 시켜주었던 메뉴는 ‘돈가스’였다. 나는 바싹한 식감과 육즙의 조화, 달콤 새콤한 소스, 드레싱이 올려져 있던 양배추 샐러드를 처음 맛보고 신세계를 영접했다. 그때까지 주요 행사 마무리는 항상 중국집 짜장면이었다. 그런데 경양식 집의 돈가스는 내게 아주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돈가스를 주문하면 수프와 빵, 돈가스, 후식으로 줄줄이 따라 나오는 음식들을 대하노라면 내가 마치 대단한 사람인 듯 대접받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 돈가스는 나에게 ‘힐링’이었다. 그것은 정신적, 육체적 만족감을 선사하는 그 자체였다.


 나에게 가장 비참한 음식은 ‘사발면(컵라면)’이다. 내가 다닌 여고에는 매점이 있었다. 많은 여고생들이 10분 그 짧은 시간에 구매, 음식 흡입, 교실 입성을 성공하려면 우사인 볼트를 능가하는 달리기를 해야 했다. 늘 매점은 북적거렸고 당차게 경쟁자들을 밀쳐내지 않으면 원하는 음식물을 제시간에 살 수 없었다. 나는 친구들과 매점을 신나게 내려가 만두나 빵, 불량과자를 사서 쓰러질 것만 같은 부실한 간이 식탁에 앉아 수다를 떨며 먹는 것이 큰 낙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소한 일로 친구와 말다툼을 하였고, 싸운 애를 쳐다보는 것도 싫어서 점심시간에 도시락도 먹지 않고 교정을 걸어 다녔다. 결국은 오후 늦게 배가 고파서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싸운 친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친구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는 걸 보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라면을 먹으려고 했으나 맞은편에서 내 존재를 잊은 듯 즐거운 친구를 보니 그 앞에서 음식을 먹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허기지면 배도 더 허기지는 법. 뜨겁기까지 한 라면 면발을 흡입하는데 입천장이 다 데면서 혼자 배고픈 티를 내며 먹는 내가 참 한심했다. 지금도 나는  사발면을 먹을 때마다 5월 넝쿨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답던 교정에서 쓰러질 듯한 간이 테이블에 외롭게 면발을 흡입하고 있는 17살 내가 떠오른다.      


 나는 자기 전에 ‘먹방’을 본다. 먹방 유투버들의 모습을 보면서 대리 만족하고,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사람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것이 재미있다. 또 어떨 때는 음식 소리 ASMR에 집중하며 안정감을 찾기도 한다. 먹는 행위는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관계, 소통, 치료, 문화 등의 키워드가 연결되어 있다.           


코로나 시기에 학교에서는 ‘먹는 것’에 대해 매우 엄격했다. 마스크를 벗어야 하기에 위생과 안전에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먹는 장소와 시간을 지정하였고, 투명 칸막이를 설치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급식실 식당에서 600명이 넘는 전교생이 밥을 먹기에 학교의 고심은 당연한 것이다. 학교 급식실 곳곳에 ‘대화 금지’, ‘지정좌석 엄수’가 적혀있다. 코로나 감염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갈 때 급식실은 나에게 매우 비인간적인 장소였다. 식당에 머무르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먹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지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옆 친구와 장난을 치거나 대화를 하지 못하도록, 얼른 식판을 비우고 일어나도록 지도해야 하는데 음식에 진심인 나는 이런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음식에 대한 음미나 음식을 먹고 난 후의 포만감, 맛있는 것을 친구와 나누어 먹는 소통과 관계와 같은 것들이 무시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국이지만 한 풀 꺾인 요즘 나는 급식실에서 아이들 먹는 모습을 찬찬히 살펴본다. 마스크를 벗은 아이들의 온전한 얼굴과 표정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급식실이다.  

   

 요즘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다.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밥을 먹지 않는 녀석들도 있다. 식당에서도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그 아래로 음식을 넣는 아이들도 있다. 이성에게 자신의 먹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의견이 강해 남녀 식사 자리를 구분하기로 했는데 이런저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코로나 시국 사춘기 아이들은 마스크로 자신의 외모 결점을 숨기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시기에 상대에게 나의 먹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은, 관계든 위생이든 안전이 확보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마라탕과 꿔바로우가 나왔다. 평소에 잘 먹지 않는 아이들까지도 내려왔고, 더 달라는 주문을 계속하였다. 혹시나 남은 음식을 더 받을 수 있을까 하여 다 먹은 아이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 통에 테이블 회전이 잘되지 않아 복잡했다. 마음이야 천천히 음미하며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주고 싶은데 시간 안에 모든 아이가 식사를 해야 하므로 목소리 톤을 높여 질서 지도를 했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먹방을 시청한다.

 점보 먹방, 대왕 먹방, 자이언트 먹방 등 섬네일에 올려져 있는 도전을 보면서  600명이 넘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같은 시간, 정해진 시간 안에 밥을 먹는 행위가,  '600인분 60분 안에 다 먹기'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의 시설과 교육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학생수가 적정했으면 좋겠다. 비참한 마라탕을 먹고 있을 아이를 위로하고, 힐링의 꿔바로우를 먹으며 만족해 하는 아이와 교감하며 음식으로도 충만감을 느낄 수 있는 여유있는 공간과 시간이  주어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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