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같은 아이들과 산문 같은 아이들

(2023.9.19.)

by 박진환

"선생님, 사랑해요. 잘 생겼고 멋있어요..."

"....."

"당황했네, 당황했어."

"그렇네. 선생님 당황해서 틀렸나봐."

"00야, 한 번 더 해 봐."

"아니거든!"

"맞는 거 같은데..."


오늘 수학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아이들이 한 편이 되고 선생님인 나와 가위바위보를 해서 정한 만큼 수세기로 많은 칸을 색칠해 나가는 놀이를 할 때였다. 짓궂은 00가 내게 좋은 말로 현혹하게 해서 가위바위보를 이기려 할 때였다. 내가 가위바위보를 지자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나를 놀려댔다. 잘 생겼다고 하니 순간 판단력을 잃었다는 말투였다. 때때로 1학년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몇몇 애들은 이게 1학년인가 싶을 정도다.


오늘은 수학 활동 시간이 조금 남아 <맨 처음 글쓰기> 밥편의 겪은 일 쓰기를 했는데, 제법 많은 아이들이 곧잘 글을 써 냈다. 이 정도면 바로 생활을(일기)를 써도 무방할 듯했다. 그 중 한 아이의 글을 옮겨 와 본다. 이 아이는 내가 글을 잘 쓰게 됐다는 칭찬에 한껏 고무된 얼굴이었다.


"이전보다 늘은 거예요?"

"그럼, 이제는 **이보다 훨씬 잘 쓰는 걸?"

"정말요? 우리 반에서 이제 내가 제일 잘 써요?"

"음... 뭐 지금은 그런 것 같네."


맛 없는 햄 | 1학년 000


저번 주에 햄을 먹었다.

근데 햄에서 치즈 맛이 났다.

그래서 엄마한테 물었다.

"이거 이상한 맛이 난다."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올리브 기름을 발랐어."

맛이 없었다.

밥은 다 먹었다.(2023.9.19)


아이들은 글은 모두 시 같다. 섯부른 멋을 부리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산문 같지만, 이 시절 아이들 글을 산문이니 시니 구분하는 것도 우습다. 시 같은 산문이고 산문 같은 시라고 보면 된다. 시가 연과 행을 구분 짓는 것도 후대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니 애초의 시는 그냥 우리 아이들의 글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학시간에는 아이들이랑 빙고놀이도 하고 수세기 채우기 대결놀이도 했다. 아이들은 특히 나랑 아이들이 각각 나뉘어 놀이를 하는 걸 재미있어 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아이들은 같은 편이 되면서 처음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잘 못하거나 실수한 아이들을 원망했다면, 지금은 너때문에 좋아졌어, 너때문에 다행이야, 걱정마 누가 해결해 줄 거야. 괜찮아 다음에 잘 하면 되지 하는 말들을 꺼내 놓는다. 여전히 일상에서 소리지르고 다툼이 잦은 아이들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변화다. 오늘은 그 변화를 좀 더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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