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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환 Mar 12. 2024

천천히 아이들을 믿고 갈 수밖에

(2024.3.12.)

"음...세상에 수를 셀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

"난이도를 알 수가 없어요."

"난이도?"

"너가 난이도를 알아?"

"네, 얼마나 어려운가 아는 거요."

"그걸 어떻게 알았대?"


녀석의 말대로 오늘은 우리 반 아이들의 난이도를 읽어내야 하는 시점을 새삼 또 발견했야 했다. <작은 배의 여행> 정도는 따라오던 지난 해 아이들과 달리 작년보다 설명을 더 하고 들어갔는데도 아이들이 해맨다. 더 바탕부터 시작해야 하나 싶었다. 사각크래용으로 몇 번 연습한 테두리 그리기를 오늘 수학공책에 적용했는데, 당화스러울 정도로 금방 잊고 다르게 하고 내가 한 보기를 보지도 않고 각자 알아서 하는 걸 보고는 너무도 당황했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이 되는 날이었다. 지난 해 아이들과 분명 출발점이 다른데, 어느 지점까지 가야 하는지를 다시 냉정하게 살펴야 할 듯했다.


교과서에 담긴 내용은 수준도 가늠할 수 없는 정도여서 들여다 볼 가치도 없어 <첫 배움책>으로 들어가 선 긋는 법을 익히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싶었다. 일단 아이들의 손과 팔에 너무도 힘이 없다. 손으로 하는 손짓놀이와 운동이 병행이 되어야 할 듯한데, 학교 수업만 가지고는 빨리 나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급식실 젓가락도 영양사님께 따로 말씀드려 오늘부터 작은 것으로 바꿔야만 했다. 아이들도 그나마 덜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다. 앞으로 속도 조절이 필요할 듯하다. 지난해를 생각하고 가면 안 될 듯하다.


학습내용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학습태도와 생활면에서도 당분간 특히 몇몇 아이들과는 계속 부딪히며 갈 수 밖에 없을 듯하다. 나의 도움이 더 필요한 아이들에게 잔소리가 많이 갈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달래고 안아주고 살살 꼬셔보기도 하고 했다. 다들 일대일로 만나면 괜찮은데, 혼자 있거나 집단으로 있을 때마다 내가 돕지 않으면 힘들어지는 경우가 자꾸 생긴다. 올해 내가 안고 가야할 업보다. ㅎ 다시 8년 전 그 시절로 되돌아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다. 녀석들과 잘 해결해 나가려 한다. 차근차근 더디더라도 참고 또 참고 가려 한다.


오늘은 아침에 한 아이가 어머님을 통해 특별한 차를 가지고 왔다. 내가 '차'를 좋아하니까 가지고 왔다는 아이의 글이 정겹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개모마일, 당 아욱, 목련, 메리골드, 구절초, 청귤, 국화...오늘은 청귤차를 아주 연하게 타주었는데도 파스타 냄새가 난다는 둥 맛이 쓰다는 둥 여전히 차는 이번 아이들에는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오늘 첫 시간은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어렵게 파도 선과 희미한 불빛 선, 아침 햇살, 갈매기 선을 그렸는데, 이 아이들에게는 아직 다가갈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있었다. 첫 배움책으로 아주 낮은 기초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아 돌아가야만 했고 내일을 기약해야만 했다.


중간놀이 시간 뒤로는 수학에서 '수'가 왜 중요한지를 이야기로 풀어내었다. 옛날 원시인들은 수를 어떻게 다루었을지 상상해 보는 수업으로 시작했는데, 이 지점에서도 아이들 모두가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 않은 듯했다. 이것도 지금까지 만난 1학년과 다른 지점이 보였다. 앞으로 많이 보여주고 많이 들려주고 생각하게 하고 말하게 하는 연습이 늘어나야 할 것으로 보였다. 학교로만 힘들고 가정에도 이것 저것 정리해서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잘한 지식이 아니라 배경지식적 사고가 필요한데, 올해 내가 아이들에게 채워줘야 할 지점이지 않을까 싶다. 혼자는 힘들다. 가정과 같이 가야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 이를 닦고 들어오는데, 한 아이가 소리를 지른다.


"야, 이 닦고 의자에 바르게 앉아 있으랬어."


귀여운 녀석. 그리고 영리한 녀석. 그래야 마지막 시간에 놀이를 할 수 있다는 걸 잘 아는 녀석. 하하하. 그렇게 오후시간은 폴짝폴짝 개구리 놀이를 했다. 역시나 이 지점에서도 아이들의 성향이 전체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드러난다.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따로 노는 아이, 게임에 참여했지만 주저하고 당황하는 아이, 게임에 몰입해서 정신없이 달려드는 아이 등 12명 속에서도 다양한 모습들이 드러난다.


다행인 것은 자꾸 반복해서 익숙해지니까 달라지고 적응을 하더라는 것. 나름 희망을 발견했다. 조급하게 맘 먹지 말자. 하나 둘, 천천히 아이들을 믿고 가자. 하~ 날은 언제 좀 맑아질 거나. 내가 좋아하는 비오고 흐린 날이긴 한데, 이렇게 길어지니 이것도 별로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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