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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환 Mar 21. 2024

이건 비밀이에요

(2024.3.21.)

"선생님 00가 김치 먹기 싫다고 매일 울어요. 그래서 학교 가기 싫다고...죄송합니다. 선생님께 00가 메시지 보내래요."


아침 일찍 00보호자로부터 문자가 왔다. 문자로 이게 되나. 전화를 드렸다.


"할머님, 힘드시지요. 그런데 왜 그런대요.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초등학교 갈 때부터 김치 먹기 싫어서 매일 저렇게 울고 그래서요."

"학교에서는 그냥 크기에 상관없이 하나만 먹으라고 하는데요. 그렇게 강요하는 분위기도 아닌데... 이것 참. 그리고 아이들 몇몇은 눈치껏 먹기도 하고 안 먹기도 합니다. 제가 못 본 척 넘어가주기도 하고요."

"00는 그런 눈치가 없어서요. 그냥 선생님이 먹으라고 하니 싫다고만 저렇게 떼를 쓰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선생님께 문자 보내라고 해서요."

"김치를 먹고 안 먹고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할머님. 문제는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해야 하는데, 할머님이나 다른 어른분들이 해결해주는 습관을 들이면 안 될 것 같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00가 저랑 타협이라는 것도 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이틀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이라고 저랑 타협을 보던지 해야 하는데 그걸 할 줄 모르니 오늘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는 경험을 쌓아야 할 것 같네요."

"네,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네, 걱정 마세요. 지금 가서 00랑 이야기 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그렇게 학교로 들어서니 할머님 덕분이었는지 자리에 떡하니 앉아 나를 보더니 때뜸 한 마디 한다.


"오늘은 읽고 싶은 게 없어서 책 안 읽었어요."

"그래? 음.. 뭐 그건 다음에 또 생기면 읽으면 되고. 00야."

"네?"

"너 김치 안 먹고 싶어서 학교 안 오겠다고 울면서 할머니 힘들게 했다던데."

"네. 김치 먹기 싫어요."

"너, 어제 그럼 식당에서 운 게 바로 김치때문이었구나."

"네."

"어떡하냐. 초등학생이 되려면 김치를 먹을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까?"

"네, 맞아요."

"하하. 너도 알고는 있네. 근데도 먹기가 싫은 거구나."

"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정 김치가 먹기 싫으면...음...그래도 조금은 먹어야 하니까.... 일주일에 한 번만 먹던지, 아님 이틀에 한 번씩 먹던지..예를 들면 말이야. 오늘은 안 먹고 내일은 먹고 다음 날은 안 먹고 그 다음 날은 먹고 그런 거지. 어때?"

"그렇게 할래요."

"그게 뭔데? 어떤 방법?"

"어. 어... 오늘은 안 먹고 내일은 먹는 거요."

"하하하. 그럼 오늘은 좀 쉬고 내일은 먹는 거다 그럼. 그런 식으로 하자?"

"네."

"그래, 이렇게 문제가 있거나 걱정이 있으면 선생님한테 이야기 해야 돼. 이제는. 할머니한테 걱정 끼치지 말고 선생님에게 먼저 이야기 하면 함께 생각해보고 선생님이 널 도와줄 수 있으니. 다음 번에는 꼭 그렇게 하자."

"네, 그럼 이건 비밀이에요."

"비밀? 아, 김치 먹는 거. 너랑 나랑 이야기 한 거?"

"네. 비밀이에요."

"그래, 그래 알았다. 암 친구들이 알면 안 되지. 샘과 너만 아는 거야?"


이렇게 해서 아침에 벌어진 김치 사건은 일단락됐다. 오늘 녀석은 식판에 깍두기 두 개를 버젓이 스스로 가져 와 놓고는 먹지 않고 버렸다. 녀석과 나의 비밀이 생겼고 녀석은 그걸 지키려 했다. 더구나 오늘은 먹지 않는 날이니.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계속 지켜봐야 할 듯하다. 에효~


오늘은 본격적으로 'ㅏ, ㅓ'를 배우는 시간. 느리게 천천히 무지 공책에 테두리를 칠하고 굵게 'ㅏ, ㅓ'를 쓰게 했다. 아직 서툴지만 이제는 제법 흉내를 낸다. 천지인 소리에서 만들어진 홀소리 두 자의 원리와 소리의 느낌을 살려 공부를 시켰고 쓰게 하는데까지 갔는데, 한 녀석이 도무지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어 끝까지 추적 지도를 했다. 아와 어를 구분을 못하길래, 평소에도 주목하고 봤던 터라 오늘은 집중을 해야 하는 이유와 그렇지 못해서 쉬는 시간에 쉬지 못하고 더 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다행히 나중에는 구분을 하고 주어진 학습을 마무리 했는데, 녀석도 더 지켜봐야 할 상황인 것 같았다.


중간놀이 시간 이후로는 작은 도화지에 손바닥을 두 장 그려 가위로 오리게 하는 활동을 시켰다. 다행히도 제법 한다. 나중에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지난 3주간 지내면서 내가 꼭 이거는 지키고 고치겠다는 다짐을 해보자 했다. 역시나 이런 다짐과 약속에는 낯선 아이들. 자기가 뭘 고쳐야 할 지, 뭘 보완해야 할 지를 모르는 아이들은 엉뚱한 대답을 한다. 자신은 잘 지키면서도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발표를 하거나 다른 친구를 따라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한 번 나는 그동안 선생님인 내 눈에 비친 모습을 이야기 해주며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냐 했다. 겨우 겨우 내용을 채워 타이핑해서 라벨지에 인쇄해 아이들을 나눠주고 손바닥에 자기가 지키고자 한 약속을 붙이게 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단 번에 지켜질 약속과 변화될 모습도 아니지만, 오늘 다시금 친구들과 함께 이런 지점을 생각했던 것으로 만족했던 시간이었다. 오늘 한 녀석이 아파서 결석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느낌이 다른 하루였다. 그나저나 오늘 비밀약속을 00는 내일 잘 지켜낼 수 있으려나. 이 소식을 아이의 할머님께 전했더니 정말 감사하다는 답이 왔다. 오늘은 아이들과 만난지 18일째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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