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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환 May 17. 2024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지만

(2024. 5. 17.)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하루. 차를 한 잔 마셨는데...우리 반 아이들은 특히 흑두차를 좋아한다. 검은콩차의 구수하고 고소한 냄새를 너무도 좋아한다. 며칠 전 하*이가 스승의 날을 맞아 쓴 편지 글에는 이전에는 차가 써서 맛도 없어 먹기 싫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고 차가 좋아졌다는 글을 써 주었다. 모든 차가 다 좋아졌겠냐마는 그만큼 지난 두 달 반은 우리 아이들에게는 성장과 적응의 기간이었다. 차를 따를 때마다 입을 삐죽 내밀던 아이들 모습은 이제 어느새 사라졌다. 대신 무슨 차인지를 궁금해 하고 때로는 이런 차를 마시고 싶다고 요구를 한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오늘도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늘의 옛이야기는 '가난뱅이 과거보기' 였다.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보다는 오늘 배운 'ㅌ'과 관련한 옛이야기 그림책 <복 타러 간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아이들은 더 큰 호응을 보여주었다. 우리 신화옥황선녀 오늘이를 패러디라도 한 듯한 이 옛이야기에 아이들은 푹 빠져 듣고 보았다. 딴 짓을 하며 처음에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다*이가 나중에 이 책을 빌려가고 싶다고 번쩍 손을 들었다. 어머니랑 꼭 같이 읽어보라 하였다. 해맑은 얼굴로 책을 받아가는 다*이도 분명 3월과 달라져 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오늘 첫 시간은 혓소리 'ㅌ'을 함께 만나 보았다. '첫 배움책'을 마무리 하고 닿소리 공책에 집을 지어 'ㅌ'과 관련된 낱말을 살펴보고 그려보고 낱말을 써보고 '맨처음 한글쓰기'에 아직 미처 쓰지 못한 낱자를 쓰는 연습을 했다. 어느새 아이들은 공책을 꺼내 자기가 해야 할 지점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일일이 해당 쪽수를 찾아 줘야 했던 때가 불과 한 달 전이었는데, 이제는 잠시 헤매는 동무를 서로 도울 정도로 익숙해지고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입에 달린 '예쁘게 천천히'는 이제 하나의 국어수업시간의 구호가 됐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3,4교시는 미처 하지 못한 국어시간의 짜투리 시간으로 시작을 해야 했다. 오늘은 'ㅌ'와 관련 있는 그림책을 보여주었다. 엣이야기 그림책 말고도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를 보여주었다. 참으로 많은 걸 먹지 않는 여동생 룰라에게 갖은 수단을 써서 오빠 찰리가 요리를 해주는데, 방법은 똑같은 음식인데도 이름을 바꿔 다는 것. 이를테면, 토마토는 '달치익쏴아', 당근은 '오렌지뽕가지뽕'...이렇게 그림책을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아이들 몇몇이 오늘 자신들이 먹을 급식에도 이름을 따로 짓는 게 어떻겠냐 한다.


좋은 생각이라 하고 8자 놀이와 달팽이놀이로 시간을 더 보내고 부랴부랴 점심시간에 급식소에 갔더니 아이들은 오늘 나온 '회오리 감자'를 '태풍'감자, '파마'감자, '소라'감자라고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역시나 먹지 않는 건 여전. 라*이는 내 옆자리에 당당히 앉으면서도 회오리 감자를 안 가지고 앉아 있길래. "자꾸 이러면 너하고 말 안 할 거야"라고 했다. 그랬더니 얼른 일어나 회오리 감자를 가지고 온다. 눈에는 또 눈물이 글썽. 회오리 감자를 굳이 안 먹겠다 하여 한 입만이라고 하고 설득해 겨우 한 입 떼어 먹고 버린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하루. 달라진 것도 많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것도 많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 것 같다. 점심시간 밥 안 챙겨 먹고, 두부도 입에 안 대고, 오이 김치는 거들 떠 보지도 않은 아이들 곁에서 숟가락으로 챙겨 입에 넣어주고 회오리 감자 먹기 좋게 떼어주고 오이김치 슬쩍 밥에 밀어 넣어주며 꼭 먹어봐라 눈짓을 준다. 마지 못해 먹으며 웃는 아이들. 이 아이들을 지켜보며 어쩌면 정말 얘들을 내가 키우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번 1학년과 작년 1학년 아이들이 내게 쓴 스승의 날 편지에는 꽤 적지 않은 아이들이 “키워주셔 고맙습니다.”를 적어 놓았다. 키우는 건 부모가 하는 일이지 내가 뭘 키웠나 싶었는데, 오늘 내가 아이들 밥을 먹이면서 드는 생각은 정말 내가 아이들을 키운다는 느낌이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던 오늘, 6학년 선생님이 내가 두 명밖에 없는 우리 반 여학생 둘을 데리고 교실로 가는 뒷모습을 찍어 보내주었다. 왠지 이 사진을 보니 눈물이 핑돈다. 주책이다. 갱년기인가...아무튼 오늘 난 오늘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우리 아이들과 72일이 된 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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