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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환 Jul 12. 2024

순식간에 다 털렸다

(2024.7.12.)

그나마 비가 잦아드는 어제 오늘. 아침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첫 시간 준비를 해야 했다. 어제 회의가 늦게까지 이어지면서 수업을 준비할 시간이 마땅치 않았다. 유치원에 가서 빨대와 종이컵을 구하고 교무실로 가서 주방세제를 빌려 왔다. 그러고는 1학년을 맡으면 해마다 여름 때 하는 비구름 만들기 수업을 위해 시범을 아침 일찍 온 아이들 앞에서 해 보았다. 일단 성공. 파란 물감 조금, 세제 조금, 물 조금을 섞어 빨래로 불어 하얀 8절 도화지 위에 거품을 떨어뜨렸다. 어느 정도 구름 모양을 만든 뒤, 마를 때까지 기다리면 끝. 마르고 난 뒤에 색연필 여러 가지 색으로 빗줄기를 그리면 마무리가 된다. 시범을 구경을 하던 아이들은 신기한 듯 환호성을 지르며 이 과정을 지켜봤다.


조금 뒤 아침맞이를 한 뒤,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오늘도 동화 '고양이 학교'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늘은 특히 수정마술이 발휘되는 시점이라 더욱 아이들의 흥미를 돋우었다. 아무래도 중고학년이 읽는 동화라 처음에 배경설명과 인물소개 때문에 꽤나 시간을 보내 딱히 흥미를 보이는 것 같지 않았는데, 조금씩 사건이 발생하면서 주목하기 시작한다. 어제부터 고양이 학교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아이들이 한 두 명씩 늘어난다. 방학 전까지는 한 권을 모두 읽어줄 것 같은데, 아무래도 모두 5권이라 나머지는 틈 나는 대로 가정에서 관심 있는 아이들 위주로 읽어주시라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아무튼 아이들은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침에 준비했던 구름만들기 수업. 아이들마다 컵에다 물감과 세제, 물을 담아 제공하고 도화지와 빨래를 건넸다. 예전에는 각자 알아서 시작하라고. 설명을 다 한 뒤에 시작을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 아이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될 듯했다.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아이들 모습을 계속 보게 하면서 한 명 한 명 지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그래도 아이들 한 명 한 명 지도하며 만들어 갈 수 있어 좋았다. 물론 내가 지도한 대로 다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적지 않은 잔소리도 섞어 가며 12명을 모두 챙겨야 했다. 실패하여 다시 하고 싶다는 아이들은 다시 한 장씩 주며 꾸역 꾸역 나갔다.


결국 어느 정도 완성이 되자. 아이들은 너무 재밌다고 좋아라 한다. 구름 아래 색연필로 빗줄기를 그리고 이름도 써서 사진 한 장씩 찍는 걸로 마무리를 했다. 이 수업을 하기 전에는 오랜만에 류재수작가의 그림책 <노랑 우산>을 보여주며 비 오는 날 풍경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은 우산을 쓰고 가는 이들이 아이들이며 학교를 가는 것이라는 걸 한동안 눈치 채지 못했다. 아무래도 큰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도 아니고 차량으로 등교하는 아이들이라 더욱 맞히기가 힘들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래도 알록 달록 우산을 쓰고 학교로 가는 풍경을 떠올리며 요즘 우리가 장마기간이라는 것도 확인해 가면서 구름과 비를 만들어 보자 했다. 게시판이 마땅히 없는 교실. 나는 교실 앞 위 가로 폭이 긴 장에 아이들 작품을 붙이는 것으로 이 시간을 마무리 했다.


중간놀이 시간 이후는 수학시간이었다. 오늘 수학시간에는 어제 배운 10개씩 묶어 수를 세는 법을 바탕으로 놀이수학을 해 보았다. 아이들이 한 편, 내가 한 편으로 나뉘어 가위바위보를 해가며 수를 묶어 세며 누가 더 많이 모았는지를 하는 놀이였다. 한동안 이걸로 시간을 보내다 1부터 50까지의 수를 읽고 세는 걸 쓰게 하는 시간으로 이어갔다. 한동안 이어가다 첫 수업이후 잠시도 쉬지 못한 나는 숨을 돌리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때 이 빈틈을 비집고 하나 둘, 아이들이 나한테 와서 안기면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힘이 들어 좀 쉬면 안 되겠냐고 해서 빙고를 하겠다는 것도 뒤로 미뤘는데, 나한테 8-9명의 아이들이 달려들어 안기고 웃고 난리다. 그리고는 어제부터 재미 삼아 하나 둘씩 건넨 새우깡을 주면 안 되겠냐고 또 난리.


절제를 했어야 했지만, 나는 아이들의 애교와 사랑스런 모습에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말았다. 새우깡도 주고 공부도 그만하고 정리하게 하도록 했다. 순간 모든 게 다 털렸다. 내가 아무리 무섭게 해도 이 녀석들은 내 속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안아 달라고 해서 안아주고 새우깡 달라해서 몇 개씩 주고 빙고놀이는 다음에 하면 안 되겠냐 해서 그러자 했다. 빈틈을 잠시라도 내 주면 이렇게 난 녀석들에게 다 털린다. 아이들과 헤어지기 전에 2주 전 캔 감자를 비닐에 싸 가게 했다. 12명이라 12개씩 싸가라 했더니 딱 맞아 떨어졌다. 그렇게 자기 자리 정리 정돈과 청소까지 하게 하고 점심 먹고 오늘 하루도 마무리를 지었다. 아이들에게 모든 걸 털린 오늘은 아이들과 만난 지 131번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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