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26.)
"선생님, 저 필통 샀어요. 엄청 좋아요."
"어. 그래? 좋겠다."
아침에 커피포트 유리가 깨져 차를 마시지 못할 것 같아 이래저래 돌아다니며 새 것을 찾으려 움직이다 **가 자랑하고픈 얘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다. 겨우 작년 진짜 내 것을 찾아 아침에 차를 대접할 수 있게 됐고 옛이야기 한 편을 들려준 뒤 수학시간을 시작하려는데, 또 **가 필통자랑을 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들어주었다.
"선생님, 이번에 산 필통은 세울 수도 있어요."
"와, 그래. 나중에 한 번 보여줘."
"네."
"와, 정말이네. 이렇게 좋은 걸 누가 사주셨니?"
"엄마가요."
"좋겠다. **는. 그런 엄마가 있어서."
정말이었다. 부산에 사시는 팔십 넘은 노모가 된 나의 어머니는 동생이 돌보고는 있지만, 더 이상 내게 필통을 사줄 수 있는 어머니는 아니다. 어릴적 나는 좋은 필통이나 필기구도 제대로 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 시절 공책 정리를 화려하게 하던 내 자리 옆 여자친구의 사인펜과 색연필이 나는 참으로 부러워더랬다. 양화점을 하시던 아버지는 그날 버신 돈을 다락방에 숨겨 놓으셨는데, 한 번은 내가 이불을 가지러 다락방에 갔다가 돈이 든 통을 보고는 그만 현금을 조금씩 훔쳤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산 건 색연필과 사인펜이었다. 나도 멋지게 공책을 정리해 가며 공부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40년이 지난 오늘 난 교사가 돼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너무도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사는 우리 아이들은 궁핍했던 내 어머니와 같은 어머니가 아닌 언제든 멋진 필통을 사줄 수 있는 엄마나 부모를 가지고 있다. 문득 이 아이들이 부러웠다고 해야 하나? 아님 그러지 못했던 우리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것일까. 묘한 감정이 내 가슴과 아침을 스쳐갔다.
오늘 수학은 '0'을 배우는 날이었다. 마침내 '0'. 이미 아이들은 '0'의 존재와 쓰임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0'을 만나는 일은 매우 심심한 과정이자 다 아는 것이어서 교과서 대로만 하면 달리 이야기 할 것이 없을 거였다. 이때 꺼내든 그림책이 바로 <날아라, 숫자 0'>(탐 리히텐헬드, 2013, 봄나무)였다. 딱이 할 일도 역할도 분명하지 않았던 '0'의 존재를 무시하던 0~9까지의 숫자들이 로마자를 만나 위기를 맞았을 때, 위풍당당하게 나서 로마숫자 군사를 곱하기 능력으로 없애버려 1~9 숫자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 '0'은 무엇이든 곱하면 존재를 사라지게 하여 '0'이 된다는 원리로 로마자 군사를 물리친다는 이야기. 아직은 곱하기 개념을 모르는 아이들이지만, '0'이 필요한 숫자라는 것. 10 이상의 쓰려면 0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0'에 대해 다시 알게 된 시간이었다. 내가 또 어제처럼 아이들을 조금 놀리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장난, 농당을 줄이려 해도 자꾸 나도 하고 싶어 잘 안 고쳐진다.
"나도 이제 0이 되어서 너희들을 물리칠 거야?"
"뭐에요~~~"
"선생님을 어제 똥 묻혀서 괴롭힌 너희들을 0이 되어서 사라지게 할 거야~"
"얘들아, 우리도 0이 되어서 선생님을 사라지게 할래?"
"그래, 우리도 0이 되자~"
"안돼, 내가 먼저 0이 될 거야."
"안돼요. 우리가 먼저 '0'이 될 거예요."
하며 달려드는 아이들 때문에 오늘도 내가 한 말에 또 발목잡혀 일방적으로 당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데로 아이들이 막 달려드는 거다. 에고....내가 잘못했다. 결국 이렇게 될 걸. 에고 에고...이 후에는 수학나라 공책에 '0'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들을 이야기 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다음으로는 놀이수학, 빨리 수 세어 숫자 쓰기 놀이를 했다. 약 60개 정도의 종이컵에 다양한 물건을 1~9까지 넣어 세 줄로 줄 지어 있는 아이들 중 맨 앞에 있는 아이가 컵 하나씩을 가져가서 세고 숫자를 학습지에 쓰고 뒤로 넘겨 이어달리기처럼 이어가는 놀이였다. 맨 뒤에 아이는 자기 것을 적고는 앞으로 갖다 놓아야 하는데, 빨리 세지 못하는 아이들의 책상에는 컵이 쌓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컵이 쌓이는 양태도 다양한데, 어떤 아이는 많게 보이는 컵은 세지 않고 한 눈에 보이는 컵만 세고 뒤로 돌리는 경향이 있어 학습지에 1~3까지의 수가 많을 때가 있다. 이런 과정에서 아이들의 학습상태와 수에 대한 감각을 알 수 있어 따로 지도할 아이들이 보이는 장점이 있다. 아울러 이 놀이는 1~9까지 수를 배운 것을 즐겁게 복습하며 새롭게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더 큰 놀이이기도 하다. 우리 반 아이들도 이 과정을 잘 즐겼고 예상했던 지점에서 학습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앞으로 계속 주목할 아이들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이들 모두는 너무 재미이었다고 했다. 일부러 릴레이 경쟁을 하지는 않았고 빠르게 세어 수슬 적을 수 있도록만 했다. 그래도 이 과정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했다. 내일 '0'에 대한 놀이를 한 번 더하면서 복습을 한 뒤로는 '10'을 이어 가르치려 한다.
3-4교시에는 국어 'ㄹ'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혓소리의 마지막 글자 'ㄹ' <첫배움책>으로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ㄹ'를 그리듯 써보고 'ㄹ'의 첫소리와 끝소리의 차이점을 알고 난 뒤에는 홀소리와 합쳤을 때의 소리 감각을 다시 익혀 보는 루틴을 반복했다. 일단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 위주로 연습을 시키고 확인시켜 가며 시간을 보냈는데, 될 듯 안 될 듯한데,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다. 앞으로 마지막 닿소리 'ㅎ'이 나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이 감각을 익혀 보길 바랄 뿐이었다. 공책에 글자 'ㄹ'을 사각크레용으로 쓰고 색연필로 낱말과 그림을 그려가며 'ㄹ' 공부를 완성해 갔다. 점심시간 이후로 국악시간이 이어지고 마지막 시간은 오랜만에 우리 1학년 학급다모임을 했다. 아직 이 아이들은 '다모임'의 개념이 없다. 서로 모여서 우리 사는 이야기를 편히 하고 싶은데, 남의 잘못이나 못한 것만 지적하는데 그친다. 학기초에 약속한 것들을 다시 확인하고 지켜가자며 격려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다음 번에는 한 가지 주제를 정해 서로 이야기 하고 지킬 것들을 생각해 보는 시간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4월 말 날씨 치고는 매우 쌀쌀했다. 이제 4월의 끝도 머지 않았다. 그렇게 맞은 56번째 만난 날. 100일이 멀지 않았는데, 100일 선물로 줄 아이들 개별 캐릭터 시안이 수업 끝날 때 즈음. 톡으로 와 있었다. 캐릭터 그림 아래 쓸 문구가 눈에 확 띄었다. 내가 써 준 글이었지만, 참 좋다.
"2023 00 새싹이들의 백일, 너희들의 모든 날이 빛나길!"
1학년 내내 우리 반 아이들이 나하고 사는 동안 빛나는 하루하루를 보내길 바란다.
오늘도 그렇게 보낸 빛난 하루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