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인정하는 걸작 <윌로 씨의 휴가>(자크 타티, 1953)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인공 윌로 씨의 괴상한 행동, 독특하게 사용된 이중인화, 반복되는 호텔에 불이 켜지는 숏, 2차 세계 대전 때 폭격을 은유한 듯한 불꽃놀이 신, 거슬리는 힌지 소리 등 <윌로 씨의 휴가>를 이루는 것들을 보았다면 이상하다·부자연스럽다·인위적이다라는 말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윌로 씨의 휴가>를 걸작으로 일컫는 현실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우리에겐 인위적인 예술을 자연스러운 예술보다 좋지 못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어떤 영화에서 감독의 의도나 조작이 드러나는 순간 그 영화를 내심 깔보며, 따라서 <윌로 씨의 휴가>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잘못되었다.
물론 난 이 글에서 <윌로 씨의 휴가>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나 또한 여타 사람들과 같이 인위적인 <윌로 씨의 휴가>를 아름다운 영화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모순을 알아보기 위해 영화에서의 인위와 자연의 관계는 조금 더 탐구할 가치가 있겠다. 이 글은 이 탐구에 관한 글이다.
우선 예술은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의견을 참고하자. 이런 의견의 대표주자로 칸트가 있다. 당연하게도 칸트가 말하는 자연은 초록빛에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공간이 아니다. 칸트는 자연을 인간이 알 수 없는 원리를 갖추고 있으며 무한한 형식을 지닌 곳으로 보았다. 여기서 ‘인간이 알 수 없는’, 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자연의 원리가 존재하는 영역을 초감성의 영역이라 한다. 그리고 자연 속 인간은 이성을 사용해 자연에 대한 형식·이론을 만들어 초감성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을 계속되게 만드는 힘은 자연의 무한한 형식과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형식의 일치에서 발생하는 발견의 기쁨이다. 또한 이 일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자연의 형식은 말 그대로 무한하기에 인간이 만든 어떤 형식과도 맞아떨어져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에서 자연에서의 경험과 유사한 경험을 추구한다. 가령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후 직관적으로 느낀 어떤 것들을 모아 어수선한 감상문을 머릿속에 적었다고 하자. 냉정하게 따지면 이 어수선한 감상문은 주관적이기에 남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영화관을 나서며 이 어수선한 감상문을 바탕으로 의견을 교환한다. 왜냐하면, 만약 영화가 자연과 유사하다면, 영화는 무한한 형식을 갖추고 있고 우리는 무한한 형식 위에서 나름의 형식적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 각자의 생각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는 예술가가 예술의 자연스러움을 없애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미적 예술은, 비록 우리가 그것을 예술로서 의식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자연으로 간주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예술의 산물이 자연으로 보이는 소이는, 예술의 산물은 규칙들에 의거함으로써만 의도된 산물이 될 수 있는 만큼, 물론 이러한 규칙들과는 아주 정확히 합치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고심의 흔적이 없고, 격식에 구애되는 형식이 엿보이는 일이 없으며, 다시 말하면 규칙이 예술가의 눈앞에 아른거려서 그의 심의력을 속박했다는 자취를 보이는 일이 없다고 하는 데에 있다.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이석윤 옮김, 박영사, 2017, p.169
이렇게 해서 칸트는 예술의 미(美)를 정의한다. 자연스러운 예술은 아름답다(美). 반면 인위적인 예술은 예술가 자신의 "심의력을 속박"하고, 관객에게 예술가의 의도를 강요하기에 추하다. 나아가 자연스러운·아름다운 예술은 관객에게 초감성의 영역과 유사한 것을 예술에서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 무한함을 주고, 이 무한함을 기반으로 관객은 예술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다.
그리고 이렇게 미를 정의하면 쾌(快)와 미가 분리된다. 쾌란 그저 주관된 감각이다. 예컨대 쾌의 대표적 감각 중 하나인 맛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민트 초코 맛을 싫어하는 사람은 민트 초코 맛을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치약을 먹는다고 빈정거리지만 이러한 빈정거림은 성립할 수 없다. 미각이란 쾌는 주관적이기만 해서 사람 사이에 교환될 수 없다. 반면 미는, 칸트의 용어로, 주관적 보편타당성을 갖춘다. 주관적인 동시에 보편적이니 우리는 어수선한 감상문을 교환하며 방금 영화관에서 본 영화에 대한 의견의 총체를 수립한다. 따라서 칸트는 미와 쾌를 구분하지 않은 에피쿠로스의 한계를 지적한다.
일체의 쾌락은 근본에 있어서 신체적 감각이라고 말한 에피쿠로스는 그러한 한에 있어서 아마도 틀린 것이 아닐 것이며, 다만 그가 지적인 만족과 그리고 실천적인 만족까지도 쾌락에 넣었던 한에 있어서만 그는 스스로 오해를 하였던 것이다.
p.199
여기서 지적인 만족이란 선험적인 규칙에 근거한 판단력에 따라 대상을 사유한 결과이고, 실천적인 만족은 규칙에 근거하지 않고 특수한 것들을 자율적인 판단력을 통해 사유한 결과이다. 이 두 만족이 합쳐진다면 판단력은 우리가 예술에 대해 가지는 직관을 개념에 대응시키는 일을 한다. 즉 우리는 판단력을 통해 예술을 보며 느낀 직관을 개념을 이용해 타인에게 전달하기 쉬운 형태로 가공한다. 판단력은 쾌와 미를 구분하게 해주는 중요한 지표인 동시에 의견 교환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셈이다.
간추리느라 칸트의 뜻을 왜곡한 감이 없잖아 있다. 어쨌든 살펴본 바에 따르면 <윌로 씨의 휴가>는 인위적이니 부자연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이 영환 관람자의 자유를 억압해야 하며, 결국 무한함과 무한함에 근거한 의견 교환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는 <윌로 씨의 휴가>를 보면서, 그리고 보고 난 후 온갖 생각을 했으며 이는 <윌로 씨의 휴가>를 본 타인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 영화가 개봉한 지 70여 년이 지났음에도 각자의 생각들을 가지고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곧장 떠오르는 답은 이렇다. 이 영화는 인위적이지만 의도적이진 않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크 타티가 <윌로 씨의 휴가>에 드러난 이상한 영화적 시도·인위적 형식을 통해 정확히 뭘 하고 싶었는지 아직도 모른다.
난 지금 의도와 인위는 다른 개념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의도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통제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칭하며, 이 통제력에 의해 관람자의 자유는 억압된다. 반면 인위는 자연스럽지 않은 형식들을 뜻할 뿐, 관객에게 통제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장난 같지만, 이 자연스럽지 않은 형식은 영화에서는 자연스럽게 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인위적인 형식에서 나름의 초감성의 영역과 나름의 무한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자연과 자연을 닮은 예술에만 초감성의 영역이 있다 해놓고 이제 와서 인위적 예술에도 초감성의 영역이 있다니. 하지만 우리가 <윌로 씨의 휴가>를 보며 느낀 무한함에 대해 설명하려면 인위적 예술에도 초감성의 영역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외엔 별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고, 무엇보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별세계론’을 듣고 나면 우리가 이미 이 '별세계론'의 방식으로, 인위에서 초감성의 영역을 찾으며 영화를 곧잘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별세계로 바라보는 시각을 취해 영화만의 초감성적 영역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별세계론’이다. 즉, 윌로 씨의 괴상한 행동, 독특하게 사용된 이중인화, 반복되는 호텔에 불이 켜지는 숏, 2차 세계 대전 때 폭격을 은유한 듯한 불꽃놀이 신, 거슬리는 힌지 소리 등, <윌로 씨의 휴가>의 특징과 반복되는 것들을 보고 우리는 해당 영화가 자신만의 규칙, 또는 칸트 식으로 말해본다면 자신만의 내적 합목적성을 지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별개의 규칙을 따르는 세계로 영화를 바라본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저 영화가 우리의 입장에서 인위적인가 자연스러운가를 구분하는 게 아니라, 아니 어쩌면 오히려 무조건 영화의 모든 형식을 인위라 여기면서(!), 별세계의 초감성의 영역에 비추어 자신만의 형식을 만든 다음 의견 교환을 하는 것이다.
어떤가? 그럴싸하지 않은가? 그런데, 또 논의를 꼬아서 미안하지만, 이 주장은 관람자의 관용에 의존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개인적인 경험을 예로 들어 말하겠다. 난 최근 영화를 좋아하게 된 친구에게 <윌로 씨의 휴가>를 추천했고, 그는 DVD까지 사서 <윌로 씨의 휴가>를 봤다. 그런데 그는 다 보고 나서 나에게 왜 이런 “이상한 영화”, “일부러 이상하게 만들어서 보는 사람 힘들게 만드는 영화”를 추천했냐며 화를 냈다.
추천받은 이를 소위 ‘영알못’, 무식한 인간으로 깎아내리기엔 그 사람은 우리가 간과하던 사실을 알려준다. 어떤 영화가 별세계이고, 별세계이기에 저 세계만의 자연스러움을 우리가 느껴야 한다면, 관람자가 우선 저 세계에 흥미를 가지고 접근하여 어떤 규칙성, 초감성의 영역을 느껴야 한다. 만약 관람자가 그러지 않고 별세계에 대한 탐구를 포기한다면, 영화는 별세계가 되기는 고사하고 아무런 생각이나 의견도 들지 않는 “이상한” 영화가 될 뿐이다.
어쩌면 추천받은 이와 같은 태도 자체가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를 보는데 집중도, 정성도 들이지 않는다면 영화를 왜 보는가? 하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별세계론’은 영화 감상 후 의견 교환의 장을 별세계의 초감성의 영역을 받아들인 사람들끼리만 대화하는 장소로 만들어 버린다. 아는 사람들만, 또는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서로의 의견에 대해 “맞다”를 연발하는 장소.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무엇보다 실제로 영화 좀 본다고 하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놀기에 그들도 이런 폐쇄적인 장을 긍정할 것 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장은 결국 고여서 이끼만 무성할 것 같다.
그렇다면 다른 길로 가기 위해 다른 수를 써보자. 내 제안은, 아예 초감성의 영역을 부정해버리는 것이다. 애당초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는 걸 왜 믿어야 하나? 따라서 초감성의 영역을 부정한다면 인위가 자연을 닮기 위해 별세계론을 쓸 필요도 없으며, 나아가 자연과 인위이라는 두 형식 사이의 차이는 사라지고 우리가 <윌로 씨의 휴가>를 보며 느낀 무한함에 대해 말할 때 초감성의 영역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초감성의 영역이 어떻게 해서 나온 개념인지 안다면 부정하기 힘들어진다. 칸트에 따르면 초감성적 영역은 우리가 이성을 위해 상정한 영역이다. 이성은 초감성적 영역을 전제해야만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내성(內省)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이해한 자연 너머 더 깊은 곳에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란 희망. 이 희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탐구해 학문이란 체계를 만들게 하며 예술로 하여금 미의 주관적 보편타당성을 갖추게 해 관람자들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게 하였다. 즉 초감성의 영역은 인간에게 보편성을 주는 법칙·원리(原理) 등을 선물한다. 우리가 영화관을 나서면서 떠드는 것도, 깨달은 사람들만 끼리끼리 모여서 떠드는 것도 초감성의 영역을 상정했기에, 어떤 원리가 있을 것이라 여기기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초감성의 영역을 사기라고 고발하는 사람은 보편성에서 벗어나 고독이란 곤경에 처한다. 이는 파스칼의 두려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의식과 목적을 빼앗겨버린 자연은 이제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든, 그 목적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든, 전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절대적으로 무관심한 우주의 거대한 침묵 속에 둘러싸인 고독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조현수 옮김, 궁리, 2010, p.52)에서 인용
그런데 파스칼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난, 영화에선 정말로 초감성의 영역이 없다고, 또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주장을 위해서 내가 적었던 「<위대한 환상>을 다시 보며」를 되짚어야 한다. 이 글에 따르면 영화관의 관객들은 보편적인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 “개별성의 재앙”을 겪는 사적인 자들이고, 영화는 이런 관객에게 “개별적으로 다가”가 관객들이 겪는 “개별성, 분리성, 비표현성”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이 논지를 견지한다면, 논의는 굉장히 이상해진다. 먼저 영화가 인위이든 자연이든 하나의 형식을 제시한다. 그런데 “개별성의 재앙”을 겪는 관객은 이 형식이 자연스럽다 해도 초감성의 영역으로 나아가 보려 하지 않고, 인위더라도 별세계의 초감성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애당초 “인류의 세계로부터의 소외”를 겪은 자들이며 보편성을 줄 초감성의 영역을 향한 이성의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초감성의 영역에 대한 이성의 정복활동을 그만두자, 비로소 자연은 불멸한다. “영화의 신화라는 건 우리가 자연을 학대하는 것이 끝나고 우리에게 매력을 잃고 나서도 여전히 자연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공동체는 사회의 권위가 우리에 대해 부정된 때에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영화에서 우리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외래(外來)적인 세계, 우리가 내성(內省)을 포기한 세계이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저 세계를 향해 이성을 써가며 탐구하는 게 아니라 저 세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 이렇게 해야만 “인류”가 “세계로부터 소외” 당했음에도 불멸하는 자연을 보며 일종의 위로를 얻는다.
그런데 여기서 관객은 마냥 수동적이지만은 않다. 자연이 언제까지나 영원하다는 것은 인간이 초감성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고, 초감성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보편성을 포기한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영화는 관객에게 개별적을 다가오고, 결국 관객이 영화에 대해 가지는 생각은 남들과 교환될 수 있는 의견이라기 보단 자기 자신에게만 타당한·진실한 생각일 뿐이다. 난 지금 흄의 다발에 대한 개념을 생각하고 있다.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 생각은 어떤 체계 안에서 나타난,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 것들이 아니라 단지 그냥 모여있는 다발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형식을 어떤 원리로 만들어볼 생각을 하지 않고 곧장 믿어버리는 자들. 이들은 이런 점에서 독재자다.
그렇다면 결론은 해괴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의 우리의 의견의 무한함은 자연과 닮은 영화에서 기인한 것도, 별세계의 영화에서 기인한 것도 아닌 그냥 각자가 생각하는 바를 곧장 표명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주관적 보편타당성에서 보편성은 빠지고 주관성만이 남는다. 아니, 주관성조차 없어지고 그냥 다발을 이루는 인상들의 계기(繼起)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관객들 사이의 의견 교환과 관객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은 공통분모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낯선 것과의 마주침이라 표현해야 할 것이다.
비록 열성적으로 말했지만, ‘굉장히 이상’, ‘해괴하다’라는 내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정작 난 이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진 못하겠다. 이 논의에 따르면 우리는 <윌로 씨의 휴가>가 내보인 형식을 향해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다 하지 않는가? 즉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눈에 비치는 저 영화의 세계에, 이미지라는 표면 밑에 원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별세계론을 사용해 보편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영화 본 다음 떠든다. 하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는 이미지란 표면이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 곧장 믿어버리면 의견 교환은 불가하고 다시 “인류의 세계로부터의 소외”를 겪는다. 이렇게 말하니 분명해진 것 같다. 갈림길이라고 했지만 실상 관객은 이 두 길을 동시에 간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할 때, 남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만들었다고 여기는 동시에 가만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이질적임을 자각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 영화에서 자연과 인위에 대해 탐구하니 불멸하는 자연이 존재할 수도 있음을 우린 이제 알았다. 그리고 이 논의를 계속해서 밀어붙인다면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영화는 쾌와 미를 분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쩌면 최초이자 마지막 예술이다. 영화에서만큼은 에피쿠로스가 옳았던 것이다. 주관적 보편타당성을 무시하는 관객들. 자신에게만은 한 없이 진실된 주관·다발을 가진 관객들. 이들은 참으로 이상하다. 이들은 파스칼의 두려움을 모르는 걸까, 알아도 상관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극복한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고, 사실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런 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들의 성질이 무엇이든 간에 내가 이 글 끝에서 할 수 있는 말은, 힘든 길을 가는 그들을 고취시키는 말 외엔 없어 보이기에.
이미지들에서 기인한 감각의 진실성을 믿었던 그(에피쿠로스)는 역사상 최초의 시네필, 하지만 아직 영화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의 시네필이었다.
유운성, 『유령과 파수꾼들』, 2018, p.390
보이는 것은 진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