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와 누 Dec 27. 2020

2020년에 본 한국영화와 영화 글들 되짚기

   2020년에 본 한국영화와 영화 글들 중 기억에 남지만 어디서도 언급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1. <공수도>(채여준)

   이 영화는 숏을 쾌활하게 이어 붙인다. 이런 식이다. 전학생 채영(정다은)은 불량배들을 두들겨 패고 괴롭힘 당하던 종구(오승훈)를 구한다. 너부러진 불량배들. 이제 채영과 종구가 대화하며 둘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것 같지만, 영화는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는 다음 날 전학생 채영이 교실에서 인사하는 숏으로 넘어가고, 그제야 종구와 채영 사이에 관계가 생긴다. 불량배들 사이에서 첫인사나 “다음에 또 봤으면 좋겠다.”라는 식의 서사 진행에 필요한 대화를 나누지 않고 다음 숏―다음 날로 훌쩍 넘어가 필요한 행위들은 한꺼번에, 그리고 간결하게 처리하는 방식은 인상 깊다.

 물론 <공수도>엔 문제점이 존재한다. 끝으로 갈수록 영화는 탄력을 잃고 흐지부지 끝난다. 쾌활한 숏 연결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런데 용두사미는 비단 <공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장편 영화를 처음 찍는 대부분의 감독들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문제이니 너무 엄격해지진 말자. 대신 채여준 감독의 더 좋은 작품을 바라자. 

    

2. <바람의 언덕>(박석영)

   <바람의 언덕>의 인물들은 서로를 마주하지 못한다. 눈에 문제가 있거나, 진실을 말하지 못해 건너편 방에서 벽 너머로 상대방을 향한 감정을 쏟아 내거나, 그런 식으로 마주하지 못하는 자신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옆모습 숏은 중요하다. 인물들이 서로를 마주하지 못하듯이 카메라도 그들과 마주하지 못한 채 찍은 옆모습 숏은 <바람의 언덕>의 인물들과 동질적이다.

 그래서 영화의 끝에 결국은 마주해 대화하는 모녀와, 180도 법칙에 따라 그들의 대화를 전개하는 두 숏은 관객들이 감동을 느껴야 할 지점이다. 마주함은 이처럼 단순한 두 숏, 두 인물을 담은 숏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데, <바람의 언덕>에선 마주함이 이다지도 힘들다. 그래서 마주한 모녀가 이후 언덕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영화의 끝을 기다리는 마지막 신, 결국엔 마주하지 않는 두 사람을 보자니 비참하다.    

 

3. 코로나와 영화에 관한 두 편의 글

   「코로나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영화를 본다는 습관에 관한 두 세가지 질문」

   「여전히 영화관에 다니고 있다」

   워너 브라더스가 자신들의 OTT 서비스 HBO max와 극장에 신작을 동시상영 한단다. MGM은 이 글을 쓰는 와중에 매물로 나왔다. 영화를 둘러싼 환경이 변하고 있다. 그리고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고, 쓰고 있다. 그 모든 글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 두 편의 글만 뽑아야 한다면, 난 위 글들을 뽑겠다.

 또한 개인적으로, 「코로나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영화를 본다는 습관에 관한 두 세가지 질문」에 등장한 영화관 민주성에 대한 성찰에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나는 「<위대한 환상>을 다시 보며」에서 영화관의 평등함을 긍정했고, 이 평등함은 민주성과 다른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코로나 사태가 길어짐에도 사람들을 계속 극장으로 불러와주는 <담보>(강대규)나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이종필) 같은 영화들, 정성일의 표현을 빌리면 관객들에게 영화관에 가는 습관을 잊지 않게 해주는 영화들은 얼마나 고마운가.

 물론 그렇다고 계속 영화관만 고집하면 안 될 것이다. 변화를 유심히 지켜봐야 한다.     


4. <사냥의 시간>(윤성현)과 <#살아있다>(조일형)

   난 두 영화를 혼동한다. 어느 정도냐면 넷플릭스에 <사냥의 시간>이 떴을 때 친구들에게 “<#살아있다> 넷플릭스에 올라왔다.”라고 말했다가 가짜뉴스라고 된통 욕을 먹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둘이 비슷하지 않은가?

 이렇게 항변하면 물어볼 것이다. “뭐가 비슷한데?”. 사실 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두 영화를 본 뒤 계속 생각하고 있으며, 이 답이 어쩌면 한국영화의 한 경향을 설명해줄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빠져있다. 일단 두 영화의 주인공은 남성 아웃사이더들이다. 또한 두 주인공은 신경이 곤두서 있으며 이런 특징은 주인공들 배역을 맡았던 유아인과 이제훈의 연기 스타일 덕에 더욱 부각된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유치하다. 송경원이 「많이 모자라지만 참 맑은 친구, '사냥의 시간'의 소년성에 대하여」에서 말한 <사냥의 시간>의 유치함이 난 <#살아있다>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주인공들의 신경질적인 행동은 그들과 관계된 모든 것을 과장되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와 행위에서 비롯된 서사는 단순하다. 이 과장됨과 단순함이 영화를 유치하게 만든다.

 난 지금 ‘소년성’을 키워드로 삼고 있으며, 이 소년성에 대해서 아직까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이다. 여담으로 영화는 아니지만 현재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웹드라마 <스위트홈>(이응복)도 이 소년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 소년성을 가진 영상물이 더 등장한다면, 이 주제로 긴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5. <트루 라이즈>(제임스 카메론, 1994)

   한국영화도 아니고, 2020년에 개봉한 영화도 아니지만 내가 2020년에 본 영화 중 나에게 의미가 있는 영화라 넣었다. 난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팬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끝으로 그가 등장하는 영화 중 내가 볼 수 있는 영화는 다 봤다. 세 보지는 않았지만 약 오십 편은 될 것이다.

 영화에 대해 말해보자면, <트루 라이즈>는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영화이다. 아내 헬렌(제이미 리 커티스)이 외도를 하는 것 같으니 잡아 가둬서 그녀의 순결함을 심문하고, 이후 아내를 창부로 위장시켜 춤을 추게 만드는 비밀요원 해리(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자신의 행동에 만족하며, 보는 우리들도 만족하게 만든다. 처벌과 관음. 요즘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역시 할리우드는 어떻게 성을 다뤄야 남성들이 돈을 내는지 아는 집단이다.

 <트루 라이즈>의 절정에 해당하는 장면들에 대해서도 말을 하겠다. 제임스 카메론은 핵폭발을 배경으로 한 해리와 헬렌의 키스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장면에 만족하지 않는다. 감독은 해리의 딸을 납치한 테러리스트가 빌딩 옥상을 오르게 해 해리로 하여금 제트기를 타고 빌딩으로 날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제트기 위에서 테러리스트와 사투 후 테러리스트를 제트기 미사일에 건 해리는 “You are fired.”라 말하며 테러리스트를 발사(!)한다. 발사된 미사일―테러리스트는 테러리스트의 헬리콥터에 명중하고, 나쁜 놈들은 한꺼번에 폭발한다.

 보여주고 싶은 게 많은 제임스 카메론은 1994년에도 여전했다. 딴죽을 걸려면 끝도 없이 걸 수 있는 장면들의 연속. <트루 라이즈>의 엄청난 허풍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 허풍이 스파게티 웨스턴이 웨스턴을 개조하며 발명한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제임스 카메론은 이를 승계한 감독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다섯 번째 자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