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하게 살기, 아니면… : 재난과 영화
2020년 01월에 쓴 글
2019년에 본 영화 중 <날씨의 아이>(신카이 마코토, 2019)가 있었다. 감독의 전작 <너의 이름은.>(2016)이 이례적인 흥행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난 이 영화도 비슷한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하지만 정작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난 뒤 양분된 의견 속에서 당황스러워했던 것 같다. 한 편에선 전작과 다른 점 없는 영화에 실망했고, 다른 한 편에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거리낌을 느꼈다. 그리고 난 갈라진 두 반응을 현실에 있었던 재난을 말하는 영화들의 맥락 속에서 취합해 보고자 한다. <날씨의 아이>는 전작과 비슷한 동시에 다르고 이 영화의 메시지는 달리 이해되어야 한다.
내 주장을 위해 재난을 말하는 영화들을 신변잡기 식으로 경유할 필요가 있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이시이 유야, 2017, 이하 <도쿄의 밤하늘>)에서 시작해보자. 남녀 주인공 신지(이케마츠 소스케)와 미카(이시바시 시즈카)는 재난 이후의 세상이 잘못되어 있다 여기며 무력하게 살아가지만 영화 후반부 미카의 자취방 신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인하며 변화를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변화하려는 이들을 비웃듯이 지진이 다시 일어나고, 남녀는 겁에 질린다. 하지만 이번엔 그들은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둘은 손을 맞잡으며 카메라는 그 손들을 클로즈업 한다. <도쿄의 밤하늘>은 남녀의 사랑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을 것이라는, 어딘가에서 많이 보았던 믿음을 따른다.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위로를 얻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 위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우린 살펴봐야 한다. 우선 영화는 관객이 사는 현실 세계에 있었던 재난과 재난에 따른 문제를 자신의 세계에 모방한다. 따라서 관객은 현실 세계와 비슷한 영화 세계에 끌리지만, 두 세곈 결정적 차이가 있다. 현실 세계는 재난에 해결책을 가지지 못하거나 불완전한 해결책을 지닌 데 반해 영화 세계는 확실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도쿄의 밤하늘>의 남녀는 남녀의 사랑이라는 확실한 해결책을 가지고 <됴쿄의 밤하늘>의 문제를 쉽게 해결한다. 자기가 제시한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는 자족적이며 닫힌 곳. 완결된 동시에 완벽한 저곳에 관객이 끼어들 틈은 없지만, 오히려 그 완결됨과 완벽함에 관객은 위로받는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은 영화에서 배운 해결책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하거나 현실 나름의 해결책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남녀의 사랑이 재난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엔 현실은 너무 복잡하다. 결국 교훈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좌절되고, 관객은 자신이 실패한 것을 태연히 해낸 영화에 더욱 이끌리게 되는 일종의 악순환에 처한다. 그렇게 무능력한 관객은 완결된 동시에 완벽한 능력 있는 영화를 꿈꾼다.
내가 과장된 말을 한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너의 이름은.>을 보자. 타키(카미키 류노스케)는 영화 중반에 운석으로 사람들이 몰살된 문제 있는 세상을 자각한다. 그렇다면 그는 또 다른 주인공인 미츠하(카미시라이시 모네)와 협력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해결은 <도쿄의 밤하늘>의 그것보다 극단적이다. <도쿄의 밤하늘>은 남녀의 사랑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을 것이란 여지만을 남긴다. <너의 이름은>은 여지를 넘어선다. 시간을 뛰어넘을 줄 아는, 엄청난 능력자들인 타키와 미츠하는 재난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며 문제 있는 세상을 무른다. 그들은 대가로 기억을 잃지만 이는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다. 올바른 세상 속에서 성인이 된 남녀는 어느 계단에서 모종의 운명을 느끼며 다시 처음 만난다. 문제 있는 세상은 완벽한 해결을 통해 소멸할 뿐만 아니라 문제 있던 아이의 기억은 올바른 세상의 성인 남녀를 위해 소비된다. 이건 표백이다.
관객은 과연 과분한 능력자들과 새하얀 세상을 보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에겐 앞서도 말했던 이 영화의 이례적인 흥행에서 답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그렇다면 위험한 행위지만 사회현상에 개인의 편협한 시선을 덧붙여 보자. 인물들의 초과된 능력은 관객의 무력함을 배가한다. 이런 인물과 관객의 양극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능력자들이 펼쳐주는 꿈을 수취하기 위해 극장을 찾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이 상황은 어떻게 보면 이제는 낡아 보이는 영화와 관련된 등식들, '영화=꿈, 영화관=꿈꾸는 장소'라는 등식들을 변용한 것 같다. 이 세계의 문제이자 저 세계의 문제인 재난과 관련된 문제를 너무나 잘 해결한 능력 있는 영화 앞에서 관객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착각하게 되며, 그 쾌감을 잊지 못해 계속해 극장을 찾는다. 이 영화의 흥행은 현혹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꿈과 꿈꾸는 장소가 만들어낸 무력한 인간. 난 이와 비슷한 상황을 <생일>(이종언, 2018)에서도 보았다. 영화 끝자락에서 마침내 용기를 낸 순남(정도연)과 정일(설경구)은 유가족들과 모여 아들의 생일을 기린다. 위로가 임박했다. 그런데 그들이 모인 장소와 준비한 장치는 기묘하다. 사람들은 거실에 단체로 모여 있고 프로젝터가 스크린을 향해 아이들의 이미지를 뿌린다. 밖으로 나가는 현관문은 닫혀있다. 저곳은 영화관이며, 저곳의 관객인 인물들과 이곳의 관객인 우리들은 눈에 비치는 것들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영화관은 시뮬라크르처럼 작동하게 된다. 두 영화관의 두 관객들은 모든 행동을 같이하며, 무한한 상호 복사에서 두 관객들이 갈구하는 구원은 선명해진다. 문제가 해결되었다. 눈에 비치는 저들, 우리와 똑같이 행동하는 저들이 그것을 보증한다. 무능한 관객의 자족적이고 능력 있는 영화를 향한 이끌림은 마침내 그 영화와 이심전심 상태가 되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쩌면 이는 영화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위로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자족적이고 닫힌 도식만을 바라보는 인간에 물음을 던졌고 이 영화에 대해서도 그래야만 한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우리의 닫힌 영화관 바깥과 저들의 닫힌 현관문 바깥에서, 관객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노파심에 말하지만 난 영화는 현실에 있었던 재난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영화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수동성에 저항해 영화관 밖에서 능동적인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항상 이야기를 필요로 하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인간은 어느 정도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영화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매체이기에 재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난 지금 관객과 영화의 관계는 능력자와 무능력자라는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 관계임을 주장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날씨의 아이>를 보자. 여전히 아이만이 문제를 깨닫는다. 이대로 가다간 도쿄는 물에 잠기며 히나(모리 나나)는 죽는다. 그렇다면 호다카(다이고 코타로)는 도쿄와 히나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는 결정적 상황에서 히나밖에 구하지 못하며 도쿄는 침수되게 내버려 둔다. 그렇다고 해서 남는 것은 호다카의 후회나 고뇌도 아니다. 그는 영화 끝에서 물에 잠긴 도쿄를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로 했다며 희한한 자긍심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세상"은 대체 어딘가? 우선 일반적인(?) 시선을 가지고 호다카의 마지막 대사에 대해 말해보자. 그의 대사는 영화의 해결책, 굳이 말로 풀어보자면 재난 후 세상을 받아들이고 나아가자는 교훈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능력 있는 영화는 다시 한번 나름의 해결책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너의 이름은.> 이후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르게도 볼 수 있다. 호다카의 마지막 대사는 <날씨의 아이>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능력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도 그럴게, 첫 번째로, 당최 우리는 히나만을 구하며 “날씨 따윈 계속 미쳐있어도”된다는 호다카의 주장을 납득하기 힘들며, 그 선택에 따라 정말로 물에 잠긴 도쿄는 황당하기 짝이 없다. 난 지금 그가 히나를 희생해서 도쿄를 구해야 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둘 다 구해야만 했다. 비록 히나와 도쿄가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있었어도, 그는 둘 다 구할 수 있었다. 기적을 일으켰던 <너의 이름은.>의 타키보다 무능한 호다카의 선택이 만든 “이 세상”은 완벽한 문제 해결을 바라던 관객의 기대를 배신한 세상이다.
두 번째로 영화 내내 아무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아우성치는 호다카의 말들, 소년 특유의 자의식에 찬 대사는 영화 끝에서 정말로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기대에서 벗어난 “이 세상”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긍정하는 호다카의 마지막 대사는 현실 세계와 유사한 <날씨의 아이>의 세계를 현실 세계에서 분리해내려는 선언처럼 보인다. 유아(幼兒)적이자 유아(唯我)적인 “이 세상”은 유치하며 독립적이다. <날씨의 아이>는 앞선 재난 영화들처럼 현실 세계의 문제를 모방하여 자신의 세계가 관객이 사는 세계와 다르지 않다고 우리를 유혹했지만 정작 그 끝에 가선 문제 해결을 포기하고 무능해지며, 현실 세상에서 독립선언을 통해 관객을 내친다.
따라서 저 마지막 대사는 관객을 향한 능력자의 가르침인 동시에 무능한 자의 자기긍정이라는 희한한 결론이 나온다. 저 세계는 우리와 같은 문제를 가진 세계인 동시에 별세계이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호다카는 문제를 해결하긴 했는데 반 즈음 해결했다.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대책 없는 <날씨의 아이>를 긍정하는 건 위험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자. 전작 <너의 이름은.>은 그 완벽한 이야기에 빠지거나, 아니면 이야기의 기만적인 성질로 인해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영화는 능력을 독점했고, 관객에겐 무능력을 부여했으며, 무능력하게 될 생각이 없는 관객은 논외로 취급했다. 하지만 <날씨의 아이>는 무능함을 받아들인다. 도쿄는 물에 잠기는 중이다. 난 이것을 발전이라 여기고 싶다. 전작과 같이 빈틈없는 문제제기-문제해결을 통해 관객을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영화관 밖으로, 현실로 내치는 이 영화는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 속에서 관객이 가지고 있었어야 할 능력과 원래 관객의 것이었던 재난이라는 문제를 도로 나누어 준다. 그렇다. "이 세상"은 아마 이 간극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영화, 해결책을 뽐내는 영화나, 현실에 대한 자신의 무력함에 몸서리치는 영화가 아닌 관객과 능력을 나눌 줄 아는 영화야 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