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8일-8월 1일 씀
박원호 교수가 쓴 『웅변의 시대를 떠나보내며』는 가치 있는 글이었다. “부풀린 목소리”와 과장된 제스처를 사용하는 웅변의 소통방식은 이젠 낡은 것이 되었고, “청중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끊임없는 대의(大義)로의 환원"과 "민주주의에 대한 처절한 사랑"이라는 웅변의 본질이 이제는 “우리의 정치적 삶과 필요"에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기에 웅변의 시대는 끝나 간다.
그런데 웅변의 시대가 끝나가는 이유에서 웅변이 여전히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부풀린 목소리와 과장된 제스처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시적이게 만든다. 이 명시적임이야말로 저항자들을 규합시키고 “현실의 모든 문제들을 야기하는 악의 기원”과 “공동체의 적”은 밝히는 데에 늘 사용된 것이 아니던가. "대의로의 환원"이 낡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여전히 저항자들에겐 효율적인 수단인 것이다.
사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부풀린 목소리와 과장된 제스처를 통한 대의로의 환원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저항자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7월 18일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반발하는 자들을 찍은 이 사진을 보자.
우리는 저 굵은 글씨로 쓰인 피켓과 신발 던지기 퍼포먼스를 각각 부풀린 목소리와 과장된 제스처의 변용으로 여길 수 있다.
그렇다면 웅변의 시대는 모습을 달리해 지속되는 것인가? 막상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날짜 중앙일보에 실린 「시위하면 잡혀간다 공포 확산…홍콩, 이젠 진짜 중국」은 홍콩에선 웅변의 시대가 끝났음을 보여주었다. 오늘날엔 저항받는 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저항자의 부풀린 목소리와 과장된 제스처 따윈 너무나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위하면 잡혀간다 공포 확산…홍콩, 이젠 진짜 중국」의 끄트머리엔 백지시위라는 새로운 저항법이 적혀 있었다. 원래 홍콩 시위대는 자신들의 다섯 가지 요구사항이 적힌 종이를 들고 시위에 나섰지만, 보안 법 이후 체포를 피하기 위해 백지를 들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난 이 백지시위와 행위 예술가 Erdem Gündüz가 행한 퍼포먼스 Standing man을 같이 생각해보려 한다. 2013년 터키 경찰의 시위대 폭력 진압에 항의하기 위해 Erdem Gündüz는 탁심 광장에 서서 공공건물을 노려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지도, 피켓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그리고 이 퍼포먼스가 어떤 경위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는지는 몰라도 곧 그의 곁에 사람들이 함께 서서 건물을 노려보았다.
백지시위와 Standing man의 공통점을 보자. 우선 해당 시위에 참가한 저항자들은 일반적인 저항자들과 다르게 더 이상 자신들의 목적을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또는 않는다). 백지에는 굵은 글씨나 원색 배합이 들어있지 않다. 혀는 멀쩡하지만 입은 닫혀있다. 부풀린 목소리와 과장된 제스처 중 후자만이 남은 것 같다. 아니, 과장되지도 않았으니 그냥 제스처, 퍼포먼스만이 남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저항받는 자의 탄압에서 비껴가기 위해 저항자들의 새로운 저항법을 발명했다. 자기들의 무기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퍼포먼스만을 행하며 공간을 점유한 이들. 비명시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려는 이들. 이들에겐 정치라는 단어보단 차라리 예술이란 단어가 어울린다. 이런 저항법의 성패 여부는 알 수 없다. 단지 웅변의 시대 다음 시대를 사는 저항자들이 성공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