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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저 Aug 23. 2023

쉬엄쉬엄 쓰기

뉴스레터 <막차> 20호 백업 

최근 친구들과의 만남이 다소 뜸해지면서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요즘 뭐하고 지내? 대학원은 많이 바쁘지? 이렇게 물으면 꼭 농담처럼 이렇게 대답한다. 나? 백수라 그냥 놀아. 수업도 안 들어. 그럼 학교는 왜 다녀? 그래도 논문은 써야지. 얼마 전에 종합시험도 봤다니까! 머쓱하게 웃으면 한 구석에 내가 이렇게 노는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얘기를 이렇게나 자주 쓸 줄은 몰랐는데.)


막차를 매주 쓰면서 ‘이거라도 쓰는 일’에 익숙해질 즈음, 생활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학교를 거의 가지 않게 되었고, 술을 거의 마시지 않게 되었고, 기타 등등... 중간에 쉬어간 주간을 포함하면 스물다섯 주가 지난 지금, 분명히 술을 마시며 취한 채 휘갈기는 그런 에세이를 표방하며 포부 넘치게 시작한 뉴스레터가, 글을 쓸수록 알코올 농도는 현저히 떨어지고 카페인 농도만 짙어진다. 


어쨌든 나는 지금 논다. 엄밀하게 진짜로 ’논다‘고 말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어쨌든, 쉬엄쉬엄 공부하고 있다는 뜻이다. 평소 잘 못 읽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SNS로 정보의 바다를 탐색하기도 하고, 드디어 미뤄둔 해외여행을 계획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 가운데 막차를 쓰기도 하고, 다른 글쓰기나 논문 주제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쉬엄쉬엄 해! 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미라클 모닝이 유행하고, 학교와 직장을 다니며 운동을 하고, 심지어는 퇴근 후 학원,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나 역시 왜인지 24시간을 알차게 계획하며 보내지 않으면 나의 쓸모가 줄어드는 것 같고, 이걸 할 시간에 다른 선택을 할 걸 후회하기도 하고, 어떤 일에 집중하는 사이 잊혀져가는 다른 무엇인가를 아쉬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쉬엄쉬엄 살아갈 수가 없다. 꾸준과 성실의 결과는 배신하지 않는다거나, 포기는 배추나 셀 때나 쓰는 말이라는, 우리는 지금 이 선택을 증명하고 삶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린다. 


그러나 일정한 루틴을 계획한다고 해서 그게 목표대로 올바르게 실현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한 우물만 파는 일에도 한참을 파다가 뙤약볕에 지치는 날엔 삽을 던지고 다른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다 찬물을 마시며 다시 그 우물을 팔 수 있는거고. 그렇게 잠깐 멈춰서서 나의 역치와 극한을 가늠해보는 일이 바로 쉼이다. 


쉬엄쉬엄 하라는 말에는 위로가 있다. 모두가 어떤 하나의 일에 힘이 부치는 때, 그 일에서 한발짝 물러나 바라보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일에 매몰되지 않고 잠시 세상을 둘러볼 때 나와 같은 이들이 이 작은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평온한 안도와 자신감이 막차 여러분에게도 찾아오길. 


20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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