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적이 된' 영화
“영화는 서사적이기를 그쳤지만, 그러나 고다르와 함께 영화는 가장 ‘소설적인 것’이 되었다. <미치광이 피에로>가 말하듯 “다음 장. 절망. 다음 장. 자유. 쓰라림”과 같은.
감독 고다르는 대담 인터뷰에서 “나는 나 자신을 수필가라고 생각하기도 해서, 소설 형태의 수필들이나 에세이 형태의 소설들을 쓰기도 합니다. 글을 쓰는 대신 글로 쓸 것을 영화로 찍을 뿐인거지요.” 라고 자신은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어순아·이용주,『장 뤽 고다르의 영화세계』, 성신여대 출판부, 2011, p.94)
‘소설적’ 이란 무엇일까? 들뢰즈는 바흐친의 정의인 “소설이란 더 이상 인물들이 여전히 단일하고 동일한 언어를 통해 얘기하는 집단적 혹은 분배적인 통일성을 갖고 있지 않다.”라는 말에 반박하며, 소설에서 “인물이 특유한 언어를 필연적으로 차용”한다고 말한다.
인물들의 계급과 성이 작가의 자유간접화법을 형성하고, 작가는 인물들의 자유간접적인 시각을 형성한다. 그래서 작가는 인물들이 보는 것, 아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을 만들어 내지만 한편으로 인물들은 그 작가가 만들어 낸 담론 안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한다. 특히 <미치광이 피에로>의 감독 장 뤽 고다르는 영화에서 끊임없이 ‘나’가 타자가 되는 반성적 인물들을 제공하는데, 이는 작가(감독)과 인물, 그리고 세계를 결합한다.
‘소설적 인물’의 예로써 <미치광이 피에로>의 두 주인공인 페르디낭과 마리안느가 있다. 페르디낭은 남성이고, 독서광이면서도 아주 사색적이며, 권태로운 인물이다. 마리안느는 여성이고, 사색적이기보다 즉흥적이고, 열정적이다. 이들을 몇 마디로 압축하는 형용사로만 보더라도, 이 각각의 인물들은 자기만의 특유한 언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남성의 언어 혹은 여성의 언어일 수도 있고, 말로써 표현하는 언어 혹은 감정으로써 표현하는 언어일 수도 있다. 이 상반된 두 인물들의 화법을 통해, 나는 그들이 서로에게 서로가 타자가 되는 인물들이라고 생각했다. 도망쳐 온 섬에서 소설을 쓰고, 느긋하게, 바다처럼 삶을 살고자 하는 페르디낭과 그 섬을 지루하게 느끼고, 재미를 찾아서 헤메이는 태양같은 열정이 있는 마리안느. 그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페르디낭은 영화의 초반에서 그가 속한 도시의 삶을 스스로 경멸하고 있다. 갑부의 딸을 아내로 두고, 슬하의 딸도 있지만, 그의 관심은 오로지 그 안에 있는 낭만적인 예술뿐이다. ‘현재의 삶에서 도피한다’는 의미에서 마리안느와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만, 후에 그가 추구하는 낭만은 마리안느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무엇보다 마리안느는 섬에서 소외를 느낀다. 그녀를 두고 풍경을 보며 느긋하게 글을 쓰려는 페르디낭을 마리안느는 못마땅하게 여긴다. 살인, 절도, 폭파와 같은 극단적 형태의 사건이 점차 단조로운 형태로 변해갈수록 그들의 소통은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한다.
마리안느의 집에서 고백한 “아니, 나는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당신을 모르겠어” / “나도 사랑해, 마리안느”라는 말은 도피의 목적지에 도착하자 “당신은 단어로 말하고, 나는 느낌으로 말하니까”, “당신은 아이디어가 없고 감정만 있어”라는 대사로 변모한다. 이는 그들 사이에 놓인 소통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언어로 말하고자 하는 남자, 보다 더 행동적인, 감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여자.
두 상반된 주인공들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자유간접화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말로써 말하는 페르디낭의 끊임없는 내적 독백은 메모의 형태로 이어진다. “다음장, 절망.” “일요일, 그녀는 열었다…” 와 같은. 페르디낭에게서는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마리안느에게 존재하는 ‘특유한 언어’는 무엇일까? 쓰고 읽는 행위를 페르디낭의 언어라고 본다면, 마리안느는 먼저 행동과 표정으로 그 언어를 이끌어낸다. 처음 등장할 때 가지고 있던 그림책, 집에 붙어있는 르누아르 등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책을 사오라는 돈으로 산 레코드판, 춤과 노래들, 즉 문자와 단어가 아닌 감정으로 파악되는 것이 마리안느의 특유한 언어인 것이다.
더불어 마리안느는 페르디낭을 영화의 끝까지 “피에로”라 부른다. 그리고 페르디낭은 그녀에게 “페르디낭이라고!”를 쉬지 않고 외친다. 이는 관객들에게 ‘이 남성을 페르디낭이라고 부르기로 하자’라는 이름의 속성을 반복해 상기시킨다. ‘피에로’라는 부름을 통해 페르디낭 자신은 페르디낭이 아닌 타자가 되며, 후에는 마리안느가 붙인 이름처럼 변화해간다.
또한 주인공들은 카메라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며 종종 대사를 치기도 한다. 이로써 관객이 영화 속에 이입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거리를 두며 동시에 관객 자신도 타자화된다.
다시 말해 “소설적인 것”이 된 영화란, 정말로 재미있는 소설처럼 개연성 있는 서사를 지닌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작가(감독)가 형성한 담론을 계속 인지하게 하면서 그것을 캐릭터들을 통해 구별되게 하는 영화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곧 작가의 자유로운 화법이다. 영화는 하나의 총체적인, 전체적인 이미지로 흐르는 것이 아닌(즉 서사적인 것이 아니라) 흐름이 단절되고 파편화 되면서 그 시간이미지를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