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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호박 Oct 18. 2021

솔직히 말하면

2 전쯤 건너 아는 사람의 자기소개서를 봐준 적이 있다. 직접 고쳐주기도 하고, 부족한 사례는 채워 보라고 조언도 해주며 여러  한글 파일을 주고받았다. 이전에도 종종 친구들의 자기소개서를 고쳐주면서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보다 한참 어리고,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던 사람이었기에  긴장하고 꼼꼼하게 봤다. 운인지 우연인지 결과가 기대보다 좋았고 나는  애의 엄마에게 옷을 선물 받았다. 한참 동안 갖고 싶었지만 제값을 할까 해서 사지 않았던 가디건이었다.


안에 목티를 입고 그 가디건을 껴입고, 좋아하는 치마에도 입고, 니트처럼 입기도 했으며 꼭 맞는 청바지에도 그 가디건을 즐겨 입었다. 가지고 있는 옷 중에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물건을 험하게 다루는 나지만 오래 입고 싶어 잘 관리하려 노력한 옷이었는데. 올봄에 세탁소에 갔다가 완전히 작아져서 돌아왔다. 실이 빳빳해져서 늘어나지가 않았다. 작년 이맘때 이사를 와서 처음 간 세탁소였다. 동네 장사라 그런지 체계적이진 않지만 사장님이 늘 친절해서 자주 가게 되는 곳이었다. 7살이 입는 옷처럼 줄어들어서 나에게 온 가디건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리기엔 무리였다.


가까운 사람이, 그리고 그로 인해 나까지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되는 날들이었다. 브랜드 본사와 세탁소가 원만하게 협의되지 않으면 소비자보호원까지 드나들며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데. 나에게는 그런 시간도 없었고 힘도 없었다. "간단하게 보상받고 끝낼 수 없는 방법은 없나요"라고 물었더니 옷값과 상관없이 세탁비의 20배를 물어주는 것이 원칙이란다. 그래 봤자 7만 원. 옷값의 반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동네장사라 내가 물고 늘어졌으면 정가까진 아니어도 비슷하게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원칙대로 해 주세요."
"감사해요. 앞으로는 더 신경 써서 해 드릴게요."

사장님은 안심하며 웃었고 나도 그냥 따라 웃었다. 그리고 아빠와 친구들에게는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지 않냐고, 나도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면 나한테도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냐고 말했다. 그런 마음이 아니었으면서. 나는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그런 상황에 들어가기 힘들어서, 피곤해서, 복잡해서 피한 거였다. 내 생각만 한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내가 넘어간다고 해서 나한테 좋은 일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내가 뭐라고. 신도 아니고 그냥 사람인데.


최근에 엄마 집에 쌀이나 먹을 것을 달라고 여러 번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냥 먹을 것이 없다고 돌려보냈는데, 쌀이 한 컵 남은 날 이 쌀을 나누어 주면 좋은 일이 생길까 해서 남은 쌀을 다 그 사람에게 주었다고 했다. 결국 엄마랑 나는 똑같다. 다가올 날들이 무언가 두려워서 우리 마음 편하자고 그런 것이다. 그런 일들이 있고 나서 시간이 꽤나 흘렀지만 우리에게 좋은 일은 오지 않았다. 피하지 않으면 괜찮은 날들이 올까. 솔직히 말하면 아닐 것 같다.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날이 영영 오지 않을까 봐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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