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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호박 Jun 06. 2019

흔한 이름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


누군가 나에게 우리나라에서 김민지라는 이름이 n번 째로 많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숫자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정확한 순위는 기억나지 않지만, 굉장히 앞 순서였던 것은 분명하다.

고등학교 때는 같은 학년에 김민지라는 이름이 많아서 여러 민지가 있었다. 2학년 때는 같은 반에 김민지가 있었고, 그 민지는 키가 170이 넘어 나는 자연스레 ‘작은 민지’로 불렸다. 그때 나는 흔하지 않고 예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가령 ‘은유’라든지 ‘봄’이라든지 특이하면서도 예쁜 이름들. 사춘기 때는 흔한 이름이 싫어 엄마에게 투정도 부렸는데 엄마는 언제나 ‘흔한 게 좋은 거야’라고 말했다. 흔해서 좋은 게 뭐지,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20살 이후로는 민지를 만나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대외활동에서도, 회사에 들어와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민지를 만나지 못했다. 회사 동료는 민지라는 이름이 그렇게 흔하냐면서 자신의 주변에는 없었다고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왜인지 모르게 내 이름의 어감이 좋아졌다. 회사 동료들이 ‘민지 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도, 엄마가 ‘민쟈’라고 부르는 소리도, 누군가 다정하게 나를 ‘민지야’라고 부르는 소리도 모두 좋아졌다.

봄에 다녀온 제주 여행에서는 이틀 동안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냈다. 매년 가는 제주도지만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밤에 별빛체험을 하는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오랜만에 쓰는 4인실이라 체크인을 할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4인실에는 경상도에서 온 대학생 2명과ㅡ그들은 친구였다ㅡ 회사 워크숍으로 제주에 왔다가 이틀 더 여행하고 간다는 내 또래의 직장인이 있었다. "저도 혼자 여행왔어요."라고 대답을 하며 우리는 암묵적으로 밤에 떠날 별빛체험에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밤이 되고, 다행히 구름이 많이 끼지 않아 게스트하우스 주인장님과 함께 별빛체험을 떠났다. 결혼 1주년으로 별을 보러 온 부부도 있었고, 옹기종기 모여 온 친구들도 있었다. 혼자 온 사람들은 우리 둘뿐이었는데, 우리는 별빛체험 장소로 가는 길에, 그리고 오름을 올라가는 길에 서로 이름도 묻지 않은 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내가 마주한 별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빛이 났다. 별사탕이라는 과자가 정말 '별'처럼 만들어졌다는 걸 그날 알게 되었다.


수많은 별들을 마주한 후유증은 나를 잠 못이루게 했고, 나와 함께한 여행객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제주 세화에서 흔하지 않은, 아주 늦게까지 운영을 하는 카페에 찾아갔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집은 어디인지, 어떤 공부를 해 왔는지. 영업 종료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아쉬운 마음에 그녀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름도 이야기 안 했었구나. 저는 신효은이에요. 이름이 뭐예요?"

"흔한 이름인데, 맞춰 보세요!"


그녀는 지영이, 민정이, 유진이를 순서대로 대답했다. 모두 아니라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민지요, 김민지."라고 대답하니 그제서야 무릎을 탁 칠뿐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쿨하게 헤어졌고, 이후로 우리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서로 별빛체험에서 찍어준 사진을 공유하기 위해 전화번호도 등록했지만 단 한 번도 안부를 묻지 않았다.


여행을 다녀오서 그날 찍은 사진들을 엄마와 함께 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는 "그러게. 다 흔하고 예쁜 이름이네. 그 이름들도 다 너랑 잘 어울린다."라고 말했다. 나도 그 이름들이 다 나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조금  어릴 적의 나는 내가 특별해지길 원했던  같다. 특별한 삶이 기억에 남는 삶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의 나는 조금 달라졌다. 나와 가족,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조금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평범하게 사는게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주 흔한  이름이 좋다. 누구든지 쉽게 발음하며 편안하게 나를 불러줄 ,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다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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