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칠 수 없다는 건

도망도 용기 있는 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by 파이썬

고3을 보내며 제일 많이 한 생각은 '도망치고 싶다'였다. 매주 대치동을 가며, 학교를 가며 내가 느낀 것은 참 세상은 보잘것없구나 하는 염세적인 마음이었다. 대치동에 가면 아이들이 항상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다들 지친 얼굴과 외로워 보이는 몸을 가지고 저마다 각자의 길을 간다. 살면서 외롭지 않았던 순간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인간은 혼자 있기 위해 만들어진 생명체 같기도 하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을 지니고 오늘도 나는 걷는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도망친다 한들 행복할까? 베르세르크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하지만 도망친 자들이 과연 낙원을 위해 떠났는지는 다 함께 한 번씩 고민해 볼 문제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도망치는 사람들이 한심하다고 여겼었다. 직면하지 않고 외면해 버리는 그들이 불쌍해 보이기도 했는데, 조금 더 살아보니 사실 도망도 그들 나름의 방법이었구나 싶다. 나라는 사람은 절대로 최후의 수단이 도망이 될 수가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나는 도망치고 싶다. 살면서 단 한순간도 도망치지 않고 싶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설령 내가 이 현실을 도피하려 어딘가로 도망친다 해도 결국 그 삶을 사는 것은 나이기에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마 평생 도망쳐온 곳을 그리워하겠지. 하지만 인생은 한번 길을 틀면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사막길이 아닌 콘크리트길을 걷기에, 나의 발자국이 바닥에 그대로 남는다. 그럼에도 단단한 용기를 지니고 뛰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의 제일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것이다. 콘크리트 위를 달리는 사람은 발이 빠질까 두려워 전속력으로 달리고 바닥에 가만히 서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넘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또한 어려운 상황을 울면서라도 직면하는 사람은 회피할 줄 아는 사람의 유연함이 부럽고, 회피할 줄 아는 사람은 갈등상황을 직면할 수 있는 그의 굳센 마음을 부러워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남을 부러워하며 산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도 누군가에겐 선망의 대상이고 부러움의 대상이다. 만약 이 세상 모두가 서로를 부러워한다면 인간 사이의 계급과 비천 따위는 없는 것이 아닐까. 아마 이 모든 계급과 무언가의 귀천은 인간의 욕구를 위해 만들어진 거겠지. 인정받고 출세하고 싶고... 모두가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사회인의 이 모든 미래지향적 욕구는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욕구를 절제하며 검소한 삶을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사는 삶이 옳은 삶인가? 우리는 어떤 목표를 지향하며 살아야 하는가? 후회하지 않을 삶이란 존재할까. 음, 나의 생각은 이렇다. 나라는 사람은 이러한 철학적 질문들에 답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렇다 해서 나의 답이 세계의 정답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질문들과 목표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괜찮으며 그저 정해진 대로 살아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냥 세상엔 다양한 답이 있는 거다. 누군가는 안전지향적인 사람이고 누군가는 낭만을 즐긴다. 이 모든 것이 섞인 사람도 존재할 것이며 귿한의 수련을 지향하는 종교인들도 많다. 결국 이렇게 생각 많은 철학자 같은 타입의 나는 살면서 평생 남의 삶을 지켜보고 질문을 던지는 스핑크스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밤이다. 끝없이 질문을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 내 삶의 질문도 답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노력의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