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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풍 May 31. 2020

기대감과 상호보완성

인문학

현대인의 기대 심리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현대인은 가상세계인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표시하지만, 실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세상일에는 별로 감흥을 못 느끼는 역설적인 심리가 있다. 길에서 서로 지나치는 살아있는 사람을 보고 미소 대신 불필요한 경계의 눈초리로 대한다. 평생 서로 사랑하겠다고 언약하고 결혼한 부부가 몇년도 안 돼서 헤어지는 일도 있다. 오래 사귀던 친구가 어떤 상황에서 부정적인 행동이나 언급을 했을 때,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수년간의 우정이 깨지기도 한다. 반면 외국인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미소도 짓고 특별히 친절을 베풀기도 하지만, 늘 만나던 사람들에게는 형식적으로 대하기 쉽다. 이런 부정적인 행동의 심리적 배경에는 인간관계에서 형성된 기대치가 작용한다. 주변 사람이 어떤 시점에 내가 설정해 둔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면, 큰 실망을 하게 되고 갑자기 상대를 비난하는 발언을 하거나 심한 경우 헤어진다. 문제는 상대방은 이런 나의 내면적인 기대치나 마음 상태를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그럴 경우, 상대방도 성인군자가 아닌 한, 나의 격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떠난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오해가 있거나 기대치가 불충족되어 문제가 발생한 경우, 미움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처럼 가깝다. 누구라도 먼저 진심으로 미안하다 또는 내가 용서하겠다고 먼저 말해주면, 어떤 불편한 관계도 얼음처럼 녹고 쉽게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체면과 자존심이 먼저 자신을 낮추고 진정한 마음으로 손을 내밀기 어렵게 만든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있지만, 한·일 관계만 보아도 해방 후 75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정한 회복이 어려운 상태이다.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서 잠시 만난 사람들과 서로 배려해주고 돌봐주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의 가치라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타인에게 설정한 기대치를 낮추거나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식사를 두 번 샀는데 친구가 계속 얻어먹는 경우처럼, 내가 잘해줘도 상대가 같은 수준으로 보답을 해주지 않으면 화가 난다. 이때 화가 나는 이유는 내가 상호주의라는 물리 세계의 원칙을 친구 간, 부모·자식 간, 부부간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친구, 직장동료, 부모 자녀, 부부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또는 내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너도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결국 모든 인간관계의 발전을 저해한다. 그렇다고 모두 성인처럼 늘 일방적으로 베풀 수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 타인을 먼저 배려해주고, 같은 대접을 받고자 하는 기대치를 내려놓고 살면,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물론 내려놓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용규 전도사는  <내려놓음>에서 비록 종교적인 관점이지만 사람이 인간적인 희망과 가치관을 내려놓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한편, 인간 존재의 기반에는 인간들 간의 상호 보완성이 작동하고 있다. 길이나 공원에서 다른 사람을 보면, 그들의 본래 모습이 완전하게 입체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입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다. 물론 손과 발이나 신체의 앞부분은 볼 수가 있지만, 거울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타인이 나를 온전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입체적으로 나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나의 모습을 가장 전체적으로 잘 볼 수 있는 사람은 타인들이지 나는 아니다. 물론 나도 타인을 잘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내가 바라보는 대상의 사람도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함은 똑같다. 이처럼 인간은 서로 상대가 못 보는 모습을 대신 볼 수 있어서, 등을 긁어주거나 머리를 잘라줄 수 있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사회성을 발휘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타인은 나의 언행을 영화 속 인물처럼 섬세하게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언행을 하는 나는 내가 무슨 언행을 하는지 모를 때도 있고, 알아도 객관적으로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내 입과 신경계통을 통해서 무언가가 빠져나간다고 느낄 뿐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타인의 언행을 직접적으로 실감 나게 느끼지만, 자신의 언행은 몸의 모습처럼 간접적으로 일부만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제한적인 자기관찰 특성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많은 점을 암시한다. 즉 인간은 혼자 존재할 수 없고, 상호 보완해주고, 협조해서 살아야 완성되는 존재이다.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만약 내가 타인의 어떤 점이 싫다고 느껴지면, 사실 내 속에도 그런 점이 있다는 뜻이다. 내가 내 속에 있는 단점을 직접 볼 수 없지만, 타인의 모습에서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따라서 타인에게서 어떤 단점이 눈에 띄면, 내가 타인을 통해 나의 단점을 거울처럼 보고 있다고 여기고 나의 단점을 고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신비한 점은 타인이 여러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내 눈에는 나의 단점과 비슷한 단점만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운전을 할 때 건널목에서 행인이 빨강 불에 건널목을 건너려고 하면, 운전자인 나는 그러한 행인을 도로 법규를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즉 타인의 단점을 인식한다. 반대로 내가 행인이 되어 빨강 불에 건널목을 건널 경우도 있다. 이 순간 지나가는 운전자가 우리를 비난하면, 뭘 그런 것으로 화를 내느냐고 반문한다. 이제 내가 운전자로서 발견했던 타인의 단점은 행인으로서 나의 단점이다. 인간의 상호 보완성을 자각하면, 타인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게 되고, 동시에 나의 단점을 고칠 수 있다. 타인에게서 단점을 발견할 때마다 비난하지 말고, 대신 깊은 탄식과 함께 나의 단점을 고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좋다. 자기 훈련을 통해 내가 먼저 나의 단점을 고치면, 더는 타인에게서 그런 단점이 보이지 않게 된다. 물론 타인이 아직도 그런 단점을 가지고 있더라도, 내 눈에는 더는 보이지 않게 된다.     


타인의 단점을 보고 나의 단점을 고치는 소극적인 단계를 뛰어넘어, 상호본완적인 관점에서 전체 인류의 문제가 나의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 숭고한 삶이다. 특히 똑같은 인간으로서 남성과 여성 간에 평등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은 21세기의 시대적 요청이다. 빌 게이츠의 부인인 멜린다 게이츠는 <누구도 멈출 수 없다-여성의 삶이 달라져야 세상이 바뀐다>에서 빈곤국의 여성이 존중받고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고, 여성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힘과 용기를 주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녀는 "우리 인간은 불굴의 의지로 엄청난 박탈감을 견딜 수 있지만,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바지할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 살아갈 의지를 빠르게 상실한다"라고 지적한다. 그녀가 바라보는 빈곤국가 여성에 대한 진지한 태도나 효과적인 지원방식은 배울 점이 많다. 빈곤 상태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빈곤에서 탈출하기 어렵고, 누군가가 먼저 도와주어야 하며, 빈곤한 사람들을 도울 때는 그들의 문화와 시각을 이해하자는 메시지가 가슴에 와닿는다. 빈곤국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빈곤층 여자아이들에 대한 교육 강화를 통해 자신감을 부여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물론 배제와 소외를 바탕으로 형성된 현대 문화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선 우리나라에서도 빈곤을 겪는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를 뉴스를 통해 자주 접한다. 미등록 수자를 포함해서 반려동물의 수가 약 1,500만 마리가 넘는 나라이지만 아직도 빈곤한 아이가 있다는 현실은 역설적이고 슬프다. 모든 빈곤층을 돕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다. 그 중에도 미래의 부모가 될 어린 세대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키워주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초석이며, 최우선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앞으로 전통적인 가정이 해체되고,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빈곤층 자녀들 지원과 교육에 대한 국가나 전체 사회의 지원이 더욱 시급하다. 경제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빈곤층 자녀들이 사회적 유대관계를 배우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멘토배정과 그룹 지도와 같은 주변환경과 지원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써준다는 것은 나의 시간과 재원을 조건 없이 제공하는 것이다. 친구 사이, 부부나 애인 사이, 직장동료 사이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배려해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진정으로 마음을 써주고, 또 이런 마음을 상대방이 느낀다면 그런 관계는 잘 유지된다. 반대로 어떤 목적이나 이해관계를 염두에 두고서 상대방에게 잘해주는 척을 하면 그런 관계는 언젠가는 깨지는 것이 인간세계의 원칙으로 여겨진다. 지인이 오랜만에 연락해 오면 일단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일로 갑자기 연락해 왔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당혹스러운 부탁 등 상대의 의도를 알게 되면, 순수하게 반가웠던 기분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친절하게 상대의 부탁을 들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불편한 상황에서도 상대방이 어려운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처음 부탁을 받았을 때의 당혹감이 사라진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려워도 내가 남을 도와주었을 때, 타인의 순수한 감사 표시는 생각지도 못한 감동을 주며, 계속해서 남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을 키워준다.      


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철학의 위안>에서 "인간의 윤리적 관념에 도달하는 일이 실제로는 복잡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인간 사고의 산출물 중에서 훌륭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가려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라고 한다. 인간은 특정 상황에서 어떤 사고가 가장 좋고 합리적인지를 당시의 감정적 판단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만 무엇이 옳은 판단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라도 마치 보험에 가입하는 것처럼 우선 타인에게 마음을 써주고 배려해주는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 그래야만 나중에 후회할 일이 적어진다. 한편, 인간이 태어날 때 두 가지 세상으로 태어난다. 우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로 탄생하고, 동시에 물질세계보다 훨씬 더 큰 생각과 정신의 세계로 태어난다. 첫 번째 육체적, 물질적인 세계는 잘 이해가 되는데, 두 번째 생각과 정신의 세계는 잘 알 수가 없다. 데카르트는 "물리적 세계는 분명한 법칙이 있지만, 정신세계는 물리법칙으로 파악이 안 되는 신의 세계이다"라고 하면서, 정신과 물질을 상호 연관이 없다고 분리해서 파악했다. 그러나 정신과 생각의 세계를 잘 몰라도, 사람들 간의 관계 경험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공통점은 있다. 모든 사람은 타인들로부터 이해, 사랑, 돌봄, 배려를 받고 싶어 한다. 한편 사람은 창조주 신이 절대적인 권능을 가졌다는 측면은 인정해도, 나아가서 그러한 절대자인 신이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을 무한한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마 인간이 성장 과정에서 경험한 가부장적이고 무서웠던 아버지의 이미지와 성장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부정적인 일들 때문에 신의 절대적인 사랑을 믿기 어려운 것 같다. 조건 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먼저 무조건 타인을 배려해주고, 이해해주고, 돌봐주는 마음 쓰기를 행동으로 보일 때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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