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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Jun 10. 2021

너를 만나 알게 된 새로운 날씨

내가 기억하는 모든 계절

 인류학이 아니더라도 나는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인류학을 공부하고 나서부터는 주변의 많은 것들을 더욱 세심하게 관찰하게   같았다. 덕분에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세상도 달랐던 남자 친구는 나의 좋은 관찰 대상   생명체이다. 그런데 신기한  내가 남자 친구를 관찰하듯 남자 친구도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구나를 새삼 알게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베를린에 와서 일주일 정도가 지나던 때인가, 같이 집을 나서려는데 남자 친구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나 알았어."

"뭘 알아? 뜬금없이 뭘 안다는 거야"

"내 생각엔 너의 세상엔 딱 두 가지의 날씨가 있어. Hot or Cold. 아 추워. 아 더워"


그 말을 듣고 너무나 맞는 말이라 웃음이 터져버렸다. 내가 날씨에 예민하게 된 건 스무 살 때 처음 남아공에서 살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분명 한국에 살던 십 대의 나는 비 내리는 날을 좋아했었다. 그리고 눈이 내리는 아주 추운 날도 좋아했다. 그런데 남아공에 처음 도착했을 때, 케이프 타운은 8월, 겨울이었다. 아프리카에도 겨울이 있냐는 질문을 빵 먹듯 자주 들어봤지만 적어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는 분명 겨울이 있었다. 그것도 눈은 내리지 않지만 뼈가 시린 겨울 말이다. 아프리카가 이렇게 추울 수도 있구나 놀랐지만 한 편으론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은 참 지난하기도 했다.


그래서 케이프타운 사람들은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초봄이 시작되는 9월부터 여름을 기다리고 기대하기 시작하는 듯했다. 나는 뜨거운 여름을 싫어해서 도대체 케이프타운의 여름은 뭐가 다르길래 사람들마다 이렇게 기다리는 걸까 궁금했다. 그리고 지중해는 가보진 않았지만 지중해성 날씨와 닮았다는 그 시원하고도 밝은 케이프타운의 여름이 왔을 때 비로소 나도 그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바닷가를 찾아갔지만 부자들이 가는 비치가 있고, 흑인들만 가는 비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땐 이게 무언가 했었다. 자연엔, 바닷물엔 국경이 없지만 굳이 바다 위에 선을 긋고 차별하는 모습은 아파르트헤이트란 단어를 책으로만 읽다가 처음으로 직접 눈으로 마주친 것 마냥 불편했다. 이렇게 외면하고 싶은 바다가 있는가 하면 다행히도 이제는 피부색과 계급을 넘어 모두에게 열린 바다도 있었고, 해변은 뜨거워도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로만 가면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해변의 사람들은 하얀 물결을 따라 서핑을 탔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맥주를 마셨다.  나는 봄부터 찾아온다는 고래는 없는지, 여름에는 상어는 혹시 없는지, 바닷물 위에 떠다니는 저건 미역인가 다시마인가, 해변을 걷다가 문득 밟히는 조개들은 왜 아무도 안 가져 가는 건지, 똑같은 바다를 가지고도 지구 반대편 사람들은 얼마나 달리 상호작용을 하는지 신기해했다. 더불어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도시에서 조금 나가면 가끔은 바닷물에서 헤엄치는 물개와 펭귄을 보기도 했다. 처음엔 우와 물개가 바다에 있어 놀라다가 맞다... 원래는 여기가 쟤네들 집인데... 하고 깨달았다. 내가 너무 인위적인 자연관을 자연스럽다는 듯 생각하고 있었구나, 동물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게 했던 케이프타운의 여름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여름을 퍽 좋아하게 되었었다.


그렇게 다시 한국에 돌아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적절히 나눠진 한국의 사계절에 익숙해질 즈음 여름을 나는 필리핀에 살게 되었다. 필리핀 사람들이 나에게 자주 묻는 질문 중에 하나는 날씨에 관한 이야기였다. 보통은 필리핀에는 없는 계절인 겨울이나 하늘에서 내리는 눈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이 물었던 질문은 우리나라의 여름도 필리핀처럼 덥냐는 것이었다.


첫 몇 해 동안은 그저 여름의 온도에 따라 필리핀처럼 덥거나 더 더울 때도 있다고 답을 했다. 사실 인도나 방글라데시처럼 적도에 가까울수록 40-50도를 훌쩍 넘는 곳에 비해 필리핀의 여름은 한국에 비해 유난히 더 더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필리핀의 날씨, 여름을 경험하면서 하게 된 대답은 한국이 필리핀처럼 덥거나 더 더운 온도를 갖기도 하지만 여름이 여기처럼 오랫동안, 몇 개월 동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더위는 가끔  더울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여름을 버틸  있었던   무더운 더위도 두세 달이면 대부분 끝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더워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고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우리는  너무 춥다고 언제 여름이 오는지 벌써 그리워진다고 말하게 만드는 계절의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필리핀에 오래 살게 되었을  나를 지독하게 힘들게 만든   하나는, 바로 우리에게 익숙할 수도 있는 뜨거운 여름 날씨가 전혀 익숙하지 않게  달이고  달이고 지속되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야 하는데, 이만하면 그만 더워도 될 것 같은데,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끊임없이 더운 필리핀의 건기, 여름 날씨. 나의 기준은 언제나 무의식 깊이 한국의 계절이 기준이었고, 그래서 필리핀의 여름은 나에겐 너무나 기나길게 느껴졌지만 필리핀 사람들에겐 그게 너무나 당연한 건기의 기간이라 특별할 것 없이 지극히 정상인 계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맨날 맨날 더웠고 덥다고 말했다. 덥다. 더위를 피해 잠시 카페에 있다 나와서도 덥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덥다. 일어나서 하는 말이 덥다인 적도 있었다. 그렇게 더운 필리핀에서 한국에 오면 그래서 나오는 첫 번째 말은 춥다였다. 물론 필리핀도 나름 건기와 우기가 있고, 우기는 필리핀 사람들 기준에는 충분히 겨울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그들에겐 추운 날도 있었지만, 한국의 여름을 제외하고 필리핀과 한국의 날씨를 비교하면 한국은 언제나 필리핀에 비해 추웠다. 필리핀에 있으면 나는 여전히 한국 날씨를 기억하는, 필리핀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는 몸뚱이였는데, 이상하게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꼭 이미 필리핀 날씨에 완벽히 적응한 사람처럼 매번 춥기만 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한국에 오면 춥다, 필리핀에 가면 덥다고 이야기하던 내가 갑자기 독일에 왔으니 매일 같이 하는 말이 덥다와 춥다는 말이 된 것 같은데 문제는 독일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계절이 바뀌는 것 같았다. 독일에 와서 며칠 동안 처음 했던 일 중 하나는 독일의 날씨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햇살은 정말 사람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다. 햇살이 구름보다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은 맞지만, 또 햇살도 햇살 나름대로 어떤 온도와 습도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편안함과 짜증과 우울과 행복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잘 관찰해보면 햇살처럼 구름 역시 어떤 온도와 분위기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우울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아늑하고 차분한 기분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런데 독일은 정말 짧은 기간 지냈지만 날씨가 양말 뒤집듯 쉽게도 바뀔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느 날은 아침에 너무 추워서 한국에서 가져온 내복 위에 맨투맨 두꺼운 옷과 코드를 입고 시내에 나갔다가, 너무 더워서 근처 화장실에 가서 내복과 코트를 벗었더니 또 오는 길에 너무 추워서 다시 코트를 껴입다. 이 변덕스러운 날씨에 나는 집에 와서 한참을 웃었다. 나의 몸은 지금 독일에 있지만 내 몸이 기억하는 날씨들은 필리핀과 한국의 경험이 가득해서 그런지 내가 기억하는 그런 날씨, 그런 온도, 그런 분위기가 생겨나면 나도 모르게 우와 덥다, 우와 춥네라고 반사적으로 말했던 것 같은데 그게 남자 친구에겐 굉장히 특이한 모양이었나 보다.


필리핀에서나 한국이었으면 하루에 한 번 정도 우와 덥다, 아니면 우와 춥다고 말했을 텐데, 베를린에 오고 나니 나도 모르게 아침에 남자 친구를 마중할 때는 아! 춥네! 점심때 도심에 나갈 땐 우와 덥네! 하고 놀라다가 다시 저녁 산책 나올 때 앗 춥잖아!라고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남자 친구와의 대화가 추워 아니면 더워라는 날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거나 끝났고, 이를 가만히 관찰하던 남자 친구가 내 세상엔 두 날씨밖에 없다고 놀린다. 생각해보니 너무 맞는 것 같아서 둘이 또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시작한 날씨 대화. 여긴 신기하게 차가운 비가 왔다. 베를린은 어떠냐는 한국, 필리핀 친구들에게

나는 나도 모르게 또 날씨 이야기를, 여기는 비가 추워라고 했다. 비가 추웠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나에게 비는 언제부턴가 따뜻한 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가 와도 언제나 더운 여름날의 비였기 때문에 필리핀에서 비는 언제나 후덥지근한 비거나 따뜻한 혹은 뜨거운 비였다.


그런데 독일의 비는 차가웠다. 남자 친구랑 동네 슈퍼를 가는 짧은 거리 안에서도 비가 왔다가 그쳤다. 비를 맞기 싫어하는 나를 보며 또 날씨 이야기를 한다고 웃는 남자 친구. 왜 비를 맞기 싫어하냐는 물음에 한참을 생각해보다가 그럼 너는 왜 그리 비를 맞는 것에 개의치 않는지 궁금했다. 나는 아직은 이렇게 얌전한 독일의 비보단 건기의 더위처럼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비가 그립기도 하고, 또 피부에 닿자마자 차가운 독일의 비가 웃음 한점 없던 쌀쌀한 독일 사람들의 첫인상 같아서 뭔가 모두 다 필리핀보다 차가운 세상 같다고 둘러댔지만 내가 생각해도 참 유별난 인상이긴 했다.


필리핀과 독일의 비를 생각하다가 문득 에스키모 사람들의 눈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떠올랐다. 겨울이 일 년 내내, 오랫동안 긴 그곳에서 에스키모 사람들이 사용하는 눈에 대한 언어는 유난히 다양하고 세부적이다. 그리고 신기하게 필리핀어에는 비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에스키모 사람들의 눈처럼 다양했다. 그냥 비가 아니라 비가 시작되려는, 이제 정말 곧 오려는, 물들이 머금어진, 살살 내리는, 세게 쏟아지는, 안개를 머금은, 습기와 더위를 머금은 비 등등등.


그래서 독일은 아마 흐린 날씨에 대한 혹은 구름에 대한 단어들이 많지 않을까 상상해보았다. 구름이 낀 우중충한, 흐린 나에겐 하나로만 보이는 그런 날씨들도 알고 보면 하나하나 모두 다를 수도 있고 스토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 이런 질문을 남자 친구에게 던지니 한참을 생각해보던 남자 친구는 말했다.

 

"특별히 없는 것 같은데?"

"음.. 그래?"


남자 친구는 없다고 했지만 왠지 있을  같은 느낌적인 느낌.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내가, 악명 높은 겨울 날씨로 유명한 독일의 날씨는 어떻게 적응해갈까? 앞으로의 베를린의 날씨들은 어떤 모습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날씨들에 조금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흐린, 구름이 잔뜩 , 우울한 날만이 아니라 특별한 이름들을 붙여주는 것이다. 흐리지만 바람이 산뜻한 ,   같지만 결국 울지 않던 , 우울할  같더니 밝게 웃던 , 등등등. 뭔가  더워,  추워만이 아니라 하루하루 소소하지만 뭔가 다른 것들이 숨어 있어 결국에는 하나하나 특별했던 날씨들, 날들. 그렇게 너와의 날들을, 나의 삼십 대를, 우리의 동거를 기억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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