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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Aug 19. 2022

글쓰기보다 더 어려운 것

something to say

글쓰기가 어려운 사람들은 첫 문장을 쓰는 것부터 어렵다고 했다. 하얀 백지를 보면 머리도 같이 하얘진다는 그 막막함.


예전에 학술적 글쓰기 강의를 찾아보다가 Coursera 코스에 올라온 스탠퍼드 대학의 글쓰기 강좌를 시청한 적이 있었다. 강의 가장 첫 시간에 교수님은 좋은 글쓴이란 누구인가라는 이야기를 나눈다.


좋은 글을 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꼽은 요인은 바로, have something to say, 말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다음으로 논리적 구조와 명확한 메시지, 효과적인 방법들을 가진 사람 등의 요인들이 꼽히긴 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먼저 내가 말하고 싶은 무엇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너무 당연한 말 같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기는 하는데 무언가를 쓰면서도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지 생각하면 멍해질 때가 있었고, 그러면 신기하게 글도 글쓴이의 생각을 따라 그대로 멍해졌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글 쓰는 게 어렵다는 그 느낌은 정확히 말하면 글 쓰는 것이 막막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가 막막해서 생긴 느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나는 이상하게 그런 막막함이 들어본 적이 드물었다. 막막할 때는 글을 쓰지 않으니까 말이다. 글이 쓰이지 않을 땐 내가 글 쓰는 능력이 모자라서라기 보다는 그저 지금은 글을 쓸 수 있을 만큼의 내 생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더불어 내가 처음 글을 쓰게 되었던 이유는 스무 살이라는 기념비적인 나이에, 휴학이라는 시간 동안의 일상을 잘 기록하고 돌아보고 싶어서였다. 글쓰기를 다른 사람들이 읽을 글보다는 스스로의 생각정리용으로 쓰기 시작하다 보니 글 쓰는 부담이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은 사진을 찍어 그 순간을 기억하듯,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하던 내게 글은 사진 대신 그 순간을 남기는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다른 사람들을 굳이 신경 쓰지 않듯, 나 역시 내 다이어리와 블로그에 글을 쓸 때는 읽는 사람보다는 나의 추억과 기억에 집중해 쓰다 보니 글 쓰는 것은 마치 사진 찍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공부하던 인류학이라는 전공에 에스노 그라피가 들어가면서 기록은 어쩌면 북유럽 사람들에게 수영할 수 있냐고 묻는 것이 마치 걸을 수 있냐는 질문과 동급인 것처럼 나에겐 글을 쓸 수 있냐는 것은 숨을 쉬고 밥을 먹고 공부를 하는 것처럼 익숙한 일인 것도 같았다.


그렇게 글 쓰는 것은 이제는 제법 내 삶의, 나의 일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다 보니 내게는 글 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생겼다. 바로 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수정하는 퇴고하기였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누구나 한국어보다 영어로 글을 쓰는 것이 어렵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당연히 어휘력이나 문장 구조, 문법과 원어민 같은 표현 등의 부족으로 영어를 쓰면 내가 하고 싶은 한국말의 딱 떨어지는 그 느낌을 영어로 옮겨내기는 무척 어렵고 아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한 가지 더 힘든 부분이 있었다. 바로 영어로 글을 쓰면 내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은 것이 떠오르면 아무리 짧거나  글도  숨에 써버리게 되는데, 약간 홀린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도 모르게 어떤 것에 대해 진하게 생각을 해보았다고 생각을 맺는 순간 글이 끝나 있었다. 글을 시작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글이 어떻게 끝날지는 글을 쓰는 중에도   없었기에 글이 완성되려면 영어는커녕 한국어로도 겨우 가능했.


그렇게 영어 또는 한국어로 된 수많은 메모들 중에서 현장에서의 사건과 감정, 그리고 교훈들을 기억하고 싶어서 적어둔 몇몇 기록들은 한국에 있는 엄마와 연결되고 싶어 페이스북에 올려두었는데, 종종 다른 분들이 그 글들을 보시곤 나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네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튀는데, 이 주제로 갔다가 갑자기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다른 주제로 갔다가 정신이 없는데, 근데 신기한 건 글 마지막에 어떻게든 그 다양한 주제들이 서로 연결이 돼.”


그건 스탠퍼드 글쓰기 강의에서 말했듯 내 생각이 그리 통통 튀어 다니니 글은 그저 내 생각의 고삐를 겨우 잡아당겨 한 자 한 자 표면 위로 내려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과 글이라는 작업은 보통 동시에 이뤄졌기 때문에 글이 끝나면 생각도 어느 정도 정릭된 듯 싶었고, 문제는 그 지점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바로 쓴 글을 다시 한번 더 보지 않는다는 것.


좋은 글을 쓰려는 목적보다는 생각과 추억을 정리하고 싶어 글을 쓰다 보니 글이 끝나면 생각은 어느 정도 더 명확해진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내가 쓴 글이 좋은 글인지, 읽기 편한 글인지에 대한, 글에 대한 부분들은 놓치며 글을 적어왔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스무 살부터 이런저런 기록들을 차곡히 쌓아왔다는 것. 덕분에 나에겐 나이가 들면서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혹은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할지 힌트를 얻기 위해 다시 꺼내 볼 수 있는 다이어리가 있었다. 그리고 종종 나는 그 옛날 다이어리의 글들을 가지고 늦게나마 시간차 퇴고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때의 기록들은 초록의 새싹처럼 푸릇푸릇하고 날 것의 강렬함이 더 묻어나 있기도 해서 가끔은 정말 이게 내가 쓴 글이 맞나 놀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은 그때의 나와 지금까지 더 살아온 내가 서로 조정을 하면서 글을 한 번 더 퇴고하게 되는데 그 작업이 나에겐 글을 새로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이번 남아공 글들을 정리하며 알게 되었다.


남아공 글은 스무 살에 다이어리에 적어둔 것이 첫 번째 기록이었고, 스물다섯에 뇌출혈에 걸려 집에서 혼자 시간을 돌아보며 그 다이어리를 바탕으로 살을 채워 넣은 것이 두 번째 기록이었다. 그리고 올해 서른다섯에 내가 어느새 남아공에서 만난 언니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해 다시 그 기록을 꺼내보게 되었고, 그 사이 마침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생겨 글을 옮기다 보니 세 번째 기록이 되어 있었다.


남아공에서의 모든 기록들을 브런치에 옮기고 거기다 휴학 기간 초반의 글을 추가해서 넣고 나니 그 이음새가 매끄러운가 싶어 처음부터 다시 한번 읽게 되었다. 남아공 기록이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록이었기 때문에, 이번 작업까지 하면 의도치 않게 무려 15년에 걸친 네 번째 퇴고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칠 부분과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았고 수정을 했음에도 여전히 많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정말이지 글은 쓰는 것보다 수정하는 것, 퇴고가 더 어렵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새삼스레 더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퇴고가 어려워서 글 쓰는 것까지 어렵게 느껴지고 싶진 않다. 글은 나에게 한정된 뇌라는 용량에 해마다 다이어리처럼 부차적으로 추가할 수 있는 확장메모리였다. 그 다이어리들이 합쳐지면 나의 있는 그대로의 삶이었고 생각이었고 살아있다는 증거였으니 글은 나에게 나처럼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다만 내가 쓴 글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정신없이 주제가 움직이고 문장 요소들이 앞뒤가 맞지 않는데도 그런 글들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댓글을 남겨주시고 또 글이 기다려진다는 다른 분들의 마음이 나에게 전해지고 나니, 뭔가 읽는 분들이 보기에도 편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 같았다.


남아공에서의 글을 다시 읽고 정리하며 문득 그렇게 정신없고 복잡하고, 어둡다가 밝고, 스무 살이었다가 서른다섯으로 왔다 갔다 하는 글을 읽고도 좋아요와 댓글을 남겨주신 분들께 감사의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스탠퍼드의 글쓰기 교수님께서 학술적 글쓰기를 설명하는 한 문장으로 “published or perished (출판하거나 폐기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말을 했다. 출판해서 읽히는 글이 되거나 쓰긴 했지만 읽히지 않아서 의미론적으로 폐기되는 학술적 글들의 운명에 대한 말이었다.


그런데 학술적 글쓰기보다는 일기와 에스노 그라피, 에세이에 가까운 나의 글들은 학술적 글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나의 글들은 출판과 폐기라는 운명 사이를 가르는 ‘읽는 사람, 독자’라는 존재 중 적어도 영원한 독자 한 명은 확보한 상태였으니까. 내가 내 글의 가장 첫번째 독자였다. 나의 추억, 기록, 삶이라는 반짝이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나에겐 소중하니까.


하지만 브런치의 글쓰기 이후 체크 모양을 클릭한 뒤 누르게 되는 ‘발행’이라는 의미가 바로 글쓰기 교수님이 말한 ‘출판, 발행, 게제’와 결이 비슷한 의미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발행이라는 단어를 보면 온전히 나를 위한 기록이었던 글이 갑자기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는 글로도 넓혀져 글을 읽을 사람들에 대해 잠시나마 떠올려보게 한다.


앞으로도 종종 자주 정신없고 웃다가 울다가 재밌다가 불편한 글들을 쓰겠지만 인내하며 마음을 다잡으며 그럼에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번 글의 something to say,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답니다 ㅎ 모두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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