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들의 교수님
인문사회대의 맨 꼭대기층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방 하나가 인류학과 도서관이었다. 개발 인류학 수업 교실이 이곳이 아니었다면 아마 매번 지나치면서도 설마 도서관일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이 숨어있을 것 같은 오래된 방문을 열면 한가운데 테이블을 둘러싼 책장이 가득한 방. 책장 위에는 그 책들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액자 하나가 눈에 띄었는데, 그 사진 속에는 원주민 한 명이 책을 읽고 있었다.
개발 인류학 수업은 내가 인류학을 공부하게 만든 과목이었다. 인류학의 필수 전공과목들이 없었다면 아마 이 과목만 일 년 내내 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과목. 한국의 인류학과들에도 없었고, 필리핀에서도 이곳 국립대학교의 인류학과에서만 찾을 수 있던 과목이었다.
그렇게 대학원 과정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리 관련 제목의 책들을 여러 권 사서 읽었는데 과연 실제 수업은 어떨지 궁금했던 수업이었다. 수강신청을 하기 전, 이미 조교수님이 이 수업은 석박사 통합 수업에 그것도 높은 학년만 듣는 수업이라 어려울 것이라 귀띔해줘서 잔뜩 긴장하며 수업에 들어갔다.
연세가 지긋해 보이시는 교수님 옆에 또 다른 연세가 지긋해 보이시는 누구? 인가 싶은 사람들의 연속. 자기소개를 하며 수업을 듣는 다섯 명 중 세명이 이미 박사생이고 나머지 한 명도 졸업을 앞둔 석사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중에 이제 첫 학기의 석사 생활을 시작한 내가 있었다.
교수님은 따갈로그어보다 영어를 더 수월하게 쓰시는 미국계 필리피노 선생님이셨다. 이미 여든이 훌쩍 넘으셔서 한국으로 치자면 명예교수님 정도로 현장에서 물러나 있으실 것 같지만, 교수님의 열정과 에너지는 그녀가 강조하는 ‘engaged anthropologist’, 참여 인류학자, 실천 인류학자의 모습을 삶으로 나타내는 듯 보였다.
여든이 넘으셨지만 석박사 과정 수업은 물론 학사생들의 수업도 맡고 계셨고, 필리핀 국립대학교의 인류학과 수업은 물론 이웃의 사립학교인 아테네오 대학의 문화인류학 수업도 함께 가르치고 계셨다. 그래서인지 교수님은 같은 학교의 타과 교수님들은 물론 다른 학교의 교님들에게도 유명한 분이셨는데, 연세가 연세인 데다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시기에 거의 교수님들의 교수님인 것 같았다.
교수님의 수업은 교수님의 삶이 곧 개발 현장에 있던 인류학자의 삶이어서 그런지 어느 날은 미국에 있다가 또 어느 날은 아프리카, 또 어느 날은 아시아 등 단순히 공간의 여행만이 아닌 80여 년의 시간 동안의 세계여행을 떠나는 느낌이 들었다.
1차와 2차 세계대전 사이에 태어나신 교수님은 그 옛날, 대부분 필리핀 어머니에 미국인 아버지가 많던 시절 독특하게 필리핀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신 분이었다. 엄마든 아빠든 같은 미국인이면 같은 혼혈인 아니야라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1930년대에는 국적을 바꿀수도 있을만큼 무척 다른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을 교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마 교수님 어머니는 교수님만큼이나 강단을 갖고 계신 분이 아니었을까.
그 옛날엔 같은 혼혈인 가족이더라도 어머니가 미국인인 가족들은 아버지가 미국인인 가족 모임과는 별개로 모였다. 게다가 아버지가 미국인이라면 어머니가 필리핀 사람이더라도 미국 국적이 나오는 반면, 어머니가 미국인이면 미국 국적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의 성별 차이가 국적이라는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차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일 같지만 실제로 성별이 차별의 이유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교수님은 살아있는 증인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