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불충분
몇 해 전 한국에서 한참 유행했던 마이클 샌델 교수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었다. 책도 좋겠지만 하버드대학교의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실제 수업 영상을 보면, 책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수업의 분위기와 학생들의 열열한 토론, 날카로운 질문들까지, 훨씬 더 생생함를 느낄 수 있다. 커다란 강당을 가득 채운 수많은 하버드생들을 한 학기 내내 그리도 열중하게 만드는 이유는 샌델 교수님이 각각의 철학적 이론과 함께 덧붙이는 현실의 사례들 때문은 아니었을까.
수업은 하버드생들도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딜레마적인 문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례들 하나 하나마다 인간 자체도 무척이나 복잡한 존재인데 그들이 사는 세상과 환경에 대한 다양한 상황과 맥락까지 엮여있어, 법이 아무리 촘촘해도 마치 법 위에 사람들이 있는 마냥 끊임없는 논리와 딜레마의 고리를 이어간다.
그 수많은 문제들 중에는 대리모에 대한 사례도 하나 나온다. 어느 부부가 합법적으로 한 대리모를 고용해 아이를 나으려고 했다. 모든 비용과 과정을 부부가 부담하며, 대리모는 아이를 낳으면 부부에게 돌려주는 계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리모가 막상 임신을 해서 아이를 10개월 동안 품고 낳고 나니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 대리모는 부부에게 아이를 줄 수 없다고 했고, 이에 부부가 이 사건을 대법원에 소송을 걸면서 분쟁은 시작되었다.
무엇이 거래를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정의롭게 만드는 가에 대한 가장 초기의 철학적 질문부터 차근차근 수업을 진행하던 차에, ‘동의’라는 개념이 나타났고, 이 사건은 처음부터 두 당사자 모두 동의하에 이뤄진 계약이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뜨거웠다.
과연 그 대리모는 아이를 유전자적 부부에게 넘기게 되었을까? 법원은 어떤 판결을 남겼을까?
문득 솔로몬 왕의 지혜로운 판결로 알려진 두 여인의 아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로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에게 솔로몬 왕은 그러면 아이를 반씩 잘라서 두 여인에게 나누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한 여인은 시큰둥한 반면, 다른 한 여인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상대방 여인이 아이의 어머니라고 절규를 했고, 그래서 솔로몬 왕은 절규하는 여인이 바로 아이의 친모라는 것을 밝혀냈다는 이야기였다.
과연 현대의 대법원은 솔로몬왕과는 또 다른 지혜로운 판결을 내릴 수 있었을까?
사건의 1심 판결은 계약의 존엄성을 근거로 부부가 승소했지만, 마지막 대법원에서는 정보의 불충분과 윤리적 이유로 계약은 무효로 결론이 내려졌다. 다만 양육권은 아이의 부부가 더 현실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가져가게 되었다.
대법원은 윤리적인 이유에 대해 이렇게 판결문을 내렸다.
“그 여성에게 돈이 얼마나 절박했든 간에, 그리고 그녀가 계약의 결과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었든지 간에, 우리는 그 합의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문명화된 사회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147p. 대법원장 Robert Wilentz]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국제개발 활동에 전념하던 시기에는 이 대법원장님이 말한 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에 울림이 컸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들을 단 두 가지,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이라는 단어로만 함축시켜버리는 국제개발현장에서 만큼이나 여전히 심심치 않게 듣던 단어가 바로 “문명화”였다. 개발이라는 개념의 기준 자체가 그 ‘문명’이라는 단어로 기준이 되던 시기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현장에 있다 보면 그 ‘문명화’ 된 나라들에서 오히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더 없는 것 같은 상황을 자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줄로만 알아서였는지 대법원장님이 말한 그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 나는 오랫동안 기억이 났었다.
그런데 문득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과 강의를 본지도 한참이 지난 요즘, 이젠 신혼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결혼 4년 차에 문득 그 미혼모 판결문이 다시 떠올랐다.
현장에 있을 때만 해도 대법원이 그 대리모의 계약을 무효로 판결한 두 가지 중 하나인 윤리적 이유가 더 기억에 남았는데,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보니 예전에는 이해는 됐지만 깊숙이 와닿지는 않던 그 나머지의 이유를 더 잘 알 것 같았다. 바로 정보의 불충분성이다.
대리모가 부부와 계약을 맺었을 때, 분명 경제적 이유가 있어 돈에 대한 결과와 그를 얻기 위한 임신과 출산이라는 1차원적인 정보를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를 바탕으로 계약을 체결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임신을 하고 아이를 약 10개월이나 제 몸속에 품고 있으며 겪게 될 아이와의 교감과, 출산 후 아이를 안아본 순간까지의 실제 과정에서 그녀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될지까지는 대리모와 부부 모두 낳기 전까지 알 수 없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대법원은 계약의 숭고함은 여전하나 이 계약의 경우 계약에 대한 정보가 불충분했다고 판결했었다.
대리모라는 사건이 세상에 존재는 하지만 주변에 흔히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던지라 판결문을 읽을 때만 해도 나는 약간은 내 일은 아니겠거니 하고 이해했던 것 같았는데, 문득 결혼생활 도중 그 판결문의 문장이 뜬금없이 이해되는 느낌.
정보의 불충분.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만큼이나 결혼생활이야말로 그 불충분한 정보의 홍수인 것 같았다. 사실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라고 꼽히는 순간순간들 모두, 그 어느 하나 예측한 대로만 굴러가겠냐만은, 태어난 순간부터 길러주신 부모님도 1촌인데 지금껏 평생 달리 살아온 남이 어느새 부모님보다 더 가까운 0촌이 되어 부부로 함께 살아가보는 결혼생활이야말로, 생활 속 순간순간이 이 정보의 불충분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렇게 서로 다른 남과 여 (혹은 같은 성별)이 한국이라는 같은 나라에서 살게 돼도 서로에 대한 정보의 불충분으로 다투는데, 하물며 전혀 다른 성별은 물론 전혀 다른 국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국제커플이 된 경우라면, 정보의 불충분이라는 책에 챕터 몇 가지가 더 늘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결혼을 하고 나면 이 사람이 과연 내가 연애를 하며 알았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싶을 때도 있겠지만, 둘 중 누구 하나라도 결혼으로 인해 살던 나라를 옮겨가야 하는 경우엔 배우자뿐만 아니라 배우자가 살고 있는 그 나라에 대해서도 과연 이 나라가 내가 생각했던 그 나라가 맞나라는 현타가 오게된다. 상대방은 물론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정보의 불충분으로 결국 한동안은 전체적인 개인의 세계관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럴 때면 가끔 결혼 전, 연애 시절 상상하고 꿈꿨던 결혼생활을 과연 우리가 잘 이뤄가고 있나싶은 의구심이 생기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괜스레
“결혼하기 전에는 안 그랬잖아. “
“연애할 때는 달랐잖아.”
“결혼하면 이럴 거라면서…”
등등의 결혼하기 전에 약속까지 했던 모든 말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며 현재를 비교해보곤 속상한 마음에 상대방을 탓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분명 어떤 일들은 상대방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들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그 대법관이 말하셨던 정보의 불충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국제결혼을 해서 해외에 둘이서 같이 새로운 삶을 꾸려간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결혼 전에 각자의 국가에서 미래의 결혼 생활을 완벽하게 상상했더라도, 그 누구도 완벽히 알고 또 준비할 순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정보’들이란 마치 아이를 직접 낳아보지 않고 아이를 좋아하는 것과 내 아이를 직접 품고 낳아 키워서 사랑하게 된 것 사이의 수많은 빈틈처럼 불충분한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오히려 누가 그렇게 될 줄 알았겠냐며, 내가 미처 다 알지 못했듯이 아마 상대방도 충분히 예상할 수 없지 않았겠냐는 이해심에 닿게된다. 우리 모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닥쳤으니 같이 해결해 나가는 수 밖에라는 생각이 들면, 부부는 예전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동지애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아마 우리는 이렇게 삶의 순간순간 틈틈이 비워진 불충분한 정보를 함께 채워가는 짝꿍이 되어가지 않을까? 아마 그런 게 결혼생활이 아닐까 싶어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