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면 더 잘 뭉칠까
언어 인류학은 인류학과의 필수 전공과목이었다. 아마 그 이유가 아니었다면 나는 굳이 이름만으로 챙겨 듣진 않을 것 같던 과목이었다. 그런데 교실엔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로 차있었다. 절반이 못 되는 학생들은 인류학과 학생들로 아마 나와 비슷한 이유로 수업을 신청한 사람들이었겠지만, 나머지 절반은 훌쩍 넘어 보이는 저 다른 과의 학생들은 누구일까 궁금했다.
다행히 교수님은 자신의 소개를 뒤로 하고 짧게 모든 학생들에게도 자기소개 시간을 주셨다. 역사학, 언어학, 사회학, 지역개발학, 심리학 등의 다양한 사회과학대 학생들이 있었지만, 특이하게도 의대생들도 제법 있었다. 언어 인류학과 의대생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학급 구성부터 흥미로운 수업이다.
언어 인류학이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인류학이라는 학문에서 필수 학문이 된 것은 어찌 보면 자명한 것 같았다. 인간이 다른 생물과 다른 점 중 가장 큰 하나가 바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언어라는 것을 사용하며, 각각의 언어 종류와 형태와 표현방법이 다를지언정 어찌 되었건 인간은 언어와 함께 살아간다.
이렇게 모든 인간이 모두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문제는 사람들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할 때 발생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언어에 대해 그리 큰 문제를 느낀 적이 없었다. 해외에 나가면서부터 한국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면서부터 불편한 점들도 있었지만, 필리핀에 와서 언어를 주제로 한 대학원 수업을 듣고 나니 차원이 달랐다.
필리핀에서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그러면 영어로 수업을 듣냐고 물었고, 또 필리핀 사람들은 그러면 따갈로그어로 수업을 듣냐고 걱정했지만, 언어 인류학 수업에서는 정말로 필리핀의 모든 언어에 대해 배우는 수업이었다.
전 세계의 언어들을 연구하는 단체들의 조사에 따르면 필리핀의 현존하는 언어는 120개에서 187개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언어의 숫자가 상이한 이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소수 언어들은 사라졌거나 사라지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개가 아닌 120여 개의 언어가 정말로 한 나라에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경우 공식적으로 우리나라는 1개의 공식 언어가 있고, 방언으로 등록된 언어 역시 제주 방언 1개이다. 그런데 필리핀의 경우, 170여 개의 언어가 ‘방언’이 아닌 실제로 서로 다른 ‘언어’로 구분된다. 따라서 필리핀 현지 친구들이 지방에서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는 필리핀 친구가 쓰는 언어와 프로젝트 현지의 언어가 달라 영어로 통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물론 언어도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이 써서 강한 언어가 있다면 아주 적은 사람들이 써서 약해지고 결국에 사라지는 위험에 놓인 언어들이 있어 수업시간에 그 170여 개의 언어를 모두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리핀 국립대학교의 특성상, 자기네 섬에서 공부 제법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7천여 개의 섬에서 온 사람들의 ‘공통어’를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단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마닐라가 속한 루손섬 중부의 타갈로그어, 북부의 일로카노, 세부섬 근처의 세부아노와 비콜라노, 중부의 일롱고, 필리핀 중동부의 와라이와라이, 그 외의 마라나오, 마긴다나오 등 6 - 8개의 언어들을 모국어로 쓰는 학생들이 이야기를 더해 수업은 수많은 언어들로 가득 찼다.
이상하게도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필리핀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또 그 특정 지역의 사람은 한 두 명뿐이라, 언어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나처럼 외국어인 듯 자국의 다른 언어를 배워가며 신기해하는 것이 신선했다.
우리는 언어의 다양성은 결국 사람들의 다양성임을 깨달았고, 사라지는 언어와 그만큼 강력해져 무례할 때도 있는 언어들 사이에서 언어의 다양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필리핀 학생들은 한 켠으론 언어가 같다면 얼마나 편리할까라는 상상을 했다.
언어가 너무 많고 달라 행정과 소통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갈등의 실마리까지 되는 실생활에서의 경험 때문에 이런 에피소드들이 수업에서 나타날 때면 학생들은 필리핀에 공통된 언어가 한 가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종종 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