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전과 후의 도시계획
내가 처음 해외에 혼자 나가 살아본 곳은 남아공이었다. 남아공 어학원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대륙에서 넘어와 머물었는데, 해외생활이 처음인 나에겐 모든 것이 다 새로웠지만 그중에서도 흥미로웠던 논쟁 중 하나는 바로 아프리카 사람들과 남미 사람들 간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 논쟁이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서울 사람들은 모를 지방 소도시 초등학교에서 들어봄직한 느낌의 그런 것이었다. 마치 여수와 목포 혹은 순천과 광양 사이에서 “너네 롯데리아 있어?” 또는 “너네 백화점 있어?”, 혹은 “그럼 너네는 CGV 있어?” 등등의 질문들을 이어가며 누구네 동네가 진짜 도시인지를 판별하는 듯한 식의 질문이었다.
어학원 수업을 같이 듣던 아프리카 애들과 남미 남자애들 오래전 내 초등학교 기억 속 남자애들처럼 목소리를 높여 가며 언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의 주제는 바로 총기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누구네 동네가 진짜 도시인지라는 질문은 결국 어디가 더 나은 지에 대한 논쟁인 것 같았는데, 이 남자애들은 초등학생들이 힘자랑하는 것처럼 자기네가 더 위험하다고 서로 자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돈 뽑으러 은행 갔다가 강도가 즉사하는 것도 봤어.”
그렇게 아프리카 친구 한 명이 말하면 가소롭다는 듯이 남미 친구 한 명이 바로 썰들을 풀어갔다.
“우리는 회사에 출근해서 커피를 뽑아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총알들이 날아왔어.”
어느 순간부터는 저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어쩌다 불이 붙어버린 남자들 간의 자존심 대결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참 여러모로 유별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에 와서 보니 그 옛날 남아공에서 들었던 그 비스무리한 논쟁이 동남아시아 사람들 내에서도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교통체증이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베트남에서 온 친구들은 교통체증 이야기만 나오면 누구 하나 지지 않고 자기네 나라 수도의 교통체증이 지구상에서 제일 심할 것이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나는 그들을 모두 필리핀에서 만났기 때문에, 적어도 그들도 필리핀 마닐라의 교통체증이 얼마나 최악인지 알고 있을 거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도시 역시 못지않게 도로가 꽉꽉 찼다니. 도대체 동남아시아의 도시들에선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동남아시아의 대도시들을 모두 다녀본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몇몇 도시를 돌아보고, 또 현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정말로 동남아시아의 대도시들이 필리핀 마닐라만큼이나 교통체증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세안 국가들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아세안 10개국 중 다섯 나라가 이미 우리나라 인구수보다 더 많아졌고, 그중 인도네시아는 어느새 3억 인구를 바라보고 있으며 필리핀은 이미 1억을 넘었고 베트남이 곧 1억 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교통체증이라는 것이 결국 차를 소유하고 운전하는 사람들의 수와 또 그 사람들 중 차를 소유할 수 있을만한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큰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유엔 환경계획(UNEP)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약 3억 2천만 명의 사람들이 아세안의 도시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2050년까지 약 5억 2천5백만여 명의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게 될 것이라 예측했다. 이는 2014년 약 인구 전체 중 47%의 사람들이 도시에 살고 있었다면, 2050년에는 무려 65%의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 것이라는 의미였다. 이렇게 특별히 아세안 지역 국가들에서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는 도시화라는 특성이 각 국가의 수도, 도시 지역의 교통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거기다 몇몇 국가들의 경우엔 도시 전체가 불의 고리나 지반이 취약한 곳에 위치한 경우도 있다. 바다 위에 존재하거나 해안가를 둔 국가들이 대부분이라 열도로 이뤄진 국가들의 경우에는 지진과 화산 운동의 영향이 잦고,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해안가 지역의 도시들 역시 무리하게 도시를 확장하거나 변경하려고 할 때, 단순히 인구증가만이 아닌 전문적으로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른 동남아 친구들에게 이 자료를 보여준다면 또 왈가왈부할 요소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알지만, 2019년에 발표된 아시아 개발은행의 자료에서는 필리핀의 마닐라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5백만 명 이상이 살고 있는 도시들 중에서는 가장 최악의 교통체증을 가진 나라로 집계되었다. 필리핀 마닐라의 뒤를 이어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 미얀마의 양곤, 베트남의 하노이와 호치민,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반둥과 자카르타가 그 뒤를 이었다.
마닐라의 교통체증은 해가 지날수록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싶은 우려를 여지없이 무시하지 않았다. 갈수록 나빠지는 것을 학교를 갈 때, 쇼핑몰에 갈 때, 이민청에 갈 때 등등 생활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는 일반 승용차들보다도 어느 곳에서든 손님들을 경쟁적으로 태우려는 대형버스와 지프니들이 도로 위를 거의 모든 방향으로 꺾고 또 멈추고 떠나면서 도로 위는 정말이지 규칙 없는 바둑판처럼 보였다. 그나마 두테르테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갑자기 드라이버들이 정류장이 아니면 손님을 태울 수도, 내려줄 수도 없다고 말하며 몇몇 규칙들을 지키며 도로 위에 잠시나마 질서가 잡히는가 싶었지만, 금세 그 질서는 모든 차들이 꼼짝없이 움직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생긴 정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리핀 정부는 그나마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차량 뒷자리에 따라 요일별로 도로이용을 막는 차량 5부제와 같은 정책을 실행했는데, 부자들이 많이 다닌다는 사립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차량 5부제 번호를 피하기 위해 아예 번호별로 차량을 구입해서 결국 매일 다닌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기도 했다.
필리핀 내에 사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 최악의 교통상황에 대해 농담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도 들렸다. 필리핀에 살고 있는 한국인 친구를 만나러 한국에서 놀러 왔던 친구가 여행을 마치고 다시 공항에 가던 길이었다. 친구를 무사히 공항에서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와중에 그 한국 분이 문자를 하나 받았다. 바로 한국으로 돌아갔던 친구가 한국에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였다.
4시간이 걸리는 비행시간 동안 친구는 필리핀에서 한국 집까지 잘 도착한 반면, 마닐라 공항에서 마닐라 집에까지 가던 그의 친구는 그 4시간 내내 여전히 도로 위에 갇혀있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 마닐라에 와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뻥 아니야라고 무시할지도 모를 그 이야기를 마닐라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감히 그게 과연 그 사람만의 이야기일까라고 생각하며,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웃프게 넘길지도 모른다.
이처럼 동남아시아를 여행으로만 간다면 단 며칠 중에 몇 시간 정도 겪고 넘길 에피소드가 될 수 있지만, 그 도시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에게는 일상생활 속 가장 영향을 크게 미치는 문제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이슈 중 하나가 교통체증이다. 그래서 필리핀에서 배우는 인류학 수업 중에서도 도시 인류학 수업 중에 이 교통체증에 대한 주제가 나왔을 때 나는 제법 신이 났었다. 드디어 이 최악의 교통체증에 대한 현지의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알아낼 수 있을 것인가?
마닐라의 교통체증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한 가지의 이유만을 꼽을 순 없다. 급격한 도시화와 도시인구의 증가, 오래된 인프라와 대중교통 시스템의 부족도 있었고, 게다가 금융시장과 자동차 시장의 다양한 옵션 등으로 돈이 많은 사람들은 물론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한 초년생들까지 여러 할부와 할인 상품 등으로 자동차를 구입하며 도로 위 자동차는 국가의 인구만큼이나 증가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인 이유를 꼽자면 각각의 분야별로 심오한 토론과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도시 인류학 수업에서 읽게 된 논문은 마닐라의 교통체증에 대해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필리핀이라는 이름을 처음 붙였던, 무려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