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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Feb 06. 2023

토끼해의 세 번째 생일

서른여섯 번째의 케이크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하지만, 그래서 아무리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이더라도 혹은 남반구나 북반구에 살더라도 지구에 사는 모든 이들은 1년에 한 번씩 한 살을 먹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일 년에 한살이라는 나이 계산 외에 내가 나이에 대해 기억하기 좋아하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바로 12 간지의 생일이다. 어릴 적 봤던 꾸러기 수비대의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영향이 너무 컸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한 번 언급하게 되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연령적 차이가 어떠하든 모두를 포함해 주는 그 12 간지 동물들 중 내 생일이 들어간 동물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기분이었다.


인간의 기대수명이 늘어간다지만 만약 인간의 나이를 1년 단위가 아닌 12 간지의 12년 단위로 센다면, 어떤 인간도 10번의 12 간지 생일맞이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10번의 12 간지는 맞이한다면, 120살이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아마 평생의 인생에 있어 7, 8번의 12 간지 생일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토끼띠인 나에겐 내 평생에 있어 7번 혹은 8번의 토끼띠 생일을 맞이할 수 있다는 의미.


그러면 80, 90, 100년이라는 말로만 들으면 아직도 먼 것 같고 기나긴 것만 같은 생의 시간이 갑자기 단 7, 8, 9번이라는 숫자로 훅 축소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게 나에게 단 7번, 8번의 생일이 주어진다면이라는 상상만으로도 지난할 것만 같은 77번, 88번의 생일들이 갑자기 한 여름, 한 계절만 살고 떠나는 매미처럼 어쩌면 무척 짧고 훌쩍 지나가는 생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게 한다. 시간을 어떤 기준으로 잡고 세느냐에 따라 멀게만 느껴지는 세월이 갑자기 몇 번 되지 않아 소중하게 느껴지는 환상이 되는 상상.


그래서 그 몇 번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나는 유난히 토끼해가 있는 생일에 의미를 둔다. 많으면 8번 정도 주어질 나의 토끼해 생일 중 어느새 3번째 토끼해 생일이 찾아왔다. 첫 번째는 너무 어려 이런 생각 없이 마냥 뛰어다니느라 특별한 기록을 하지 않았지만, 두 번째부터는 그 특이성을 발견하고 새해부터 기록해 둔 것이 바로 신은 과연 참을 수 있는 아픔만 주실까 와 인도여행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토끼해는 아마 이 일기장이 되지 않을까 싶다.


첫 번째 토끼해는 한국에 있었고, 두 번째 토끼해는 인도에 있었다면, 세 번째 토끼해를 나는 독일에서 보내고 있다. 첫 번째 토끼해에는 내가 타지해서 이렇게 굵직한 생일들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는 나 자신은 물론 나를 아는 사람들도 상상하지 못했을 일들일 것이다.


세 번째 토끼해 생일을 맞은 나는 내 인생에는 없을 것만 같던 결혼이 들어와 있었고, 그래서 독일에 살게 되었고, 그래서 그동안은 한 번도 떠올려본 적 없는 생일선물을 생각하게 되었다.


생일이 가까워 오면서 생일에 하고 싶은 것, 생일 때 받고 싶은 것은 없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생각해 봤다. 토끼해 생일로는 세 번째일 뿐이지만, 매해 돌아오는 생일로 생각해 보면 이런 질문을 받은 것도 어느새 서른여섯 번이나 되는 것이다. 도대체 서른여섯 번이나 받아본 이 질문의 대답은 무엇일까.


며칠을 생각하다 생일이 다가오며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햇살이었다. 독일에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빌어본 적 없던 생일 선물. 이 뜬금없어 보이는 생일 선물을 나는 왜 이리도 간절히 원하게 되었는가 생각해 보니 그렇다 할 햇살을 받아본 지 얼마나 되었나 세어보니 어느새 13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비타민 D도 챙겨 먹고 햇살을 쬔 것과 같은 기운을 준다는 조명도 비춰보았지만 마치 어제 혹은 지난주의 어느 날처럼 아침부터 똑같이 흐리고 우중충하고 어두운 하늘을 보면 일어나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독일의 겨울은 이 정도면 이제 해가 나올 만도 하겠지 싶은 날에도 어김없이 해가 나오지 않아 나중에는 괜스레 없던 편두통까지 생산해 내는 겨울인 것 같았다.


남편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처럼 아마 독일의 겨울날씨도 독일의 50가지의 흐린 날처럼 똑같이 흐려 보여도 아마 다 다를 거라고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건네보기도 했지만, 나는 13가지의 흐린 날을 스트레이트로 경험하고 나니 내 생일날 만큼은 그저 제발 환한 날이길 생일 며칠 전부터 바랐다.


그리고 대망의 토끼해 생일 전날,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뉴스의 날씨예보를 보는데 그냥 독일 전역이 먹구름이었다. 시간별 구름의 이동경로에도 유럽이라는 대륙이 다른 대륙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 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구름 하나에 유럽의 절반은 쏙 들어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생일 선물을 뭘 갖고 싶냐는 물음에 햇살이라고 말했던 내게 같이 기도해 주겠다고 했던 친구의 답변에 나는 무덤덤하게 다시 재답글을 달았다.


내일도 비가 올 거야.


그리고 과학은 예외가 없다는 듯, 생일이 되던 자정 그리고 잠에 들기 직전인 새벽 1시 반까지도 밖에서는 축축이 내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기대 없이 늦은 아침 눈을 떴는데, 눈이 부셨다. 평소와 다르게 오랜만에 눈이 부신 경험을 해서인지 왜 눈이 부실까라는 생각을 순간 했다가 밖을 보는 순간 청명한 하늘색에 놀라 나는 혼자 소리를 질렀다.


우와!!! 햇살이 비추는 생일이라고!! 진짜 밝은 날씨를 주셨어!!


나는 너무 기뻐 안방과 거실과 주방의 창문밖을 세 번이나 체크하면서 진짜 이게 밝은 날씨인지를 확인한 뒤, 재빠르게 욕실로 들어가 나갈 채비를 했다. 비현실적으로 밝은 날씨라는 것을 몇 해동 안의 독일 생활로 체득한 탓에, 지금 당장은 이렇게 밝더라도 이 햇살이 언제 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구름으로 바뀔지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서 빨리 나가 해가 떠있는 동안 해를 맞이하는 것이 내가 해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생일이고 뭐고 부리나케 준비해서 집을 빠져나오고 보니,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햇살을 구걸했는지 필리핀과 남아공에 있을 때만 해도 그 어떤 무엇보다도 넉넉한 것이 햇살이었는데 싶어 새삼 내가 유럽사람이 되긴 됐나 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햇살을 쫓아 시내로 나와보니 오늘따라 사람들 표정도 햇살처럼 밝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의 13일 만에 햇살다운 햇살이 나왔으니 기쁜 사람은 단지 나뿐만이 아닐 터. 분명 기상예보에서도 흐리고 비가 올 거라 했는데 이렇게 청명한 하늘에 반짝이는 햇살까지 마주하니 심지어는 하늘에게까지 생일선물을 받은 느낌.


그렇게 햇살을 받으며 오늘이 생일인데 무슨 케이크를 먹을까 혼자 생각하다 무슨 케이크를 먹을까라는 질문도 벌써 서른여섯 번이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여섯 번이나 나는 무슨 케이크를 먹을지를 또 생각하고 있네를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문득 길가에 앉아 있는 노숙자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기다란 건물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만끽하고 있던 아저씨의 표정에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미소가 머물고 있었고, 아저씨는 밝은 표정으로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보통은 이렇게 웃지도, 인사를 건네지도 않는 베를린 사람들인데 나도 워낙 기분이 좋았던 터라 수줍게 웃으며 인사에 답했지만 카드만 가지고 있던 나는 딱히 드릴 게 없어 뭔가 거리를 두고 지나치게 돼버렸다. 아무리 해가 뜬 날씨라도 겨울은 겨울이라 너무 추웠고, 해가 져버릴까 싶어 허둥지둥 나와버린 탓에 아침도 먹지 못한 탓에 나는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점으로 들어가 쌀국수를 하나 시켰다. 그 국수를 하나 먹는 사이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고, 창밖의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지나치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생일 햇살 선물은 이걸로 끝인가 싶다가 문득 길가에 있던 아저씨는 그럼 비를 피했을까 싶었다. 쌀국수를 하나 싸가서 드릴까 하다 자리를 옮겼으면 괜히 국수를 사게 된 것이니 괜한 헛걸음을 하지 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니 그냥 버스를 타고 돌아가자라고 생각하고 가게를 나오는데 비가 왔다는 흔적만 바닥에 남기고 다시 밝게 해가 비추는 풍경이 펼쳐졌다. 햇살을 쬐고 싶어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는 중에 멀리서 아까 봤던 아저씨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맞은편에 있던 카페로 들어가 큼직한 사과파이 하나와 커다란 카푸치노 한 잔을 따뜻하게 데워달라고 했다. 그 두 개의 따뜻한 간식을 들고 아까와는 달리 아저씨에게 다가가 인사를 다시 나눴다.


오늘이 내 생일인데 이 케이크가 내 생일 케이크에요. 커피랑 선물이에요.


아저씨랑 나는 햇살 때문인지 따뜻한 커피 때문인지 모르게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미소로 인사를 나눴고, 나의 생일 케이크는 그걸로 족했다. 뭔가 남아있는, 내게 필요하지 않은 자투리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가 먹을 것처럼 새것을 예쁘게 담아 건네었다는 것이 뭔가 더 뿌듯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케이크를 대접할 수 있는 부나 기술을 갖고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끔 케이크를 먹고 싶을 때 못 먹는 삶은 아니었다. 굳이 생일이 아니어도 가끔 케이크를 먹고 싶을 때는 먹을 수 있었고, 그래서 굳이 서른여섯 번째 세 번째 토끼해라고 해서 꼭 내가 케이크를 먹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먹어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과 그 행복을 나눠도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햇살 같은 경험을 했던 나의 세 번째 토끼해 생일. 몇 번의 토끼해 생일을 더 경험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번의 햇살 같은 경험을 기대해보려고 한다.



필터없이 파랗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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