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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Feb 26. 2023

마블 어벤저스 행성 중에 필리핀이 있었다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

마블의 인기가 서서히 올라 정점을 찍던 시절에도 나는 마블 히어로들보단 실제 삶의 현장에서의 히어로들에 관심이 더 많았고, 그래서 마블의 영화들이 영화관을 점령하던 때에도 그 흔한 아이언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필리핀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때에 어벤저스: 인피니티워가 나타났다. 그나마 얼굴이 낯익은 히어로들이라고는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토르가 전부인데 그 모든 캐릭터는 물론이고 마블의 거의 모든 히어로들이 나오는 영화라 꼭 봐야 한다며 친구가 나를 극장으로 끌고 갔다.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히어로들까지 무더기로 나오는데 배경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자막도 없이 영어로 엔드게임을 보려고 하니 도대체가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영화 이름처럼 끝없는 전쟁을 치르며 보석들을 하나씩 모아가던 타노스라는 거인이 영화 막바지에서 그 모든 보석들을 가지고 손가락 스냅을 튕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사람들이 하나 둘 폼페이의 화산재처럼 사라져 버렸다.


영화 속 히어로들도 도대체 무슨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거냐며 당황하고 있는데 이제 처음 마블 영화를 보는 나라고 알턱이 있나. 그렇게 영화 속 사람들도,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도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와중 이 사단을 만든 타노스가 어느 평화로워 보이는 산꼭대기 안의 원두막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영화는 끝나버렸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 마블판 행동하는 멜서스야 뭐야'


마블이나 타노스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던 나는 정신없이 진행되던 기승전 이후 갑작스러운 결부분에 멘붕이 왔다. 히어로 영화들은 영웅들이 이기는 게 보통 아닌가 생각하며 자리를 일어서려고 하는데, 친구가 엔딩크레디트가 모두 끝나야 볼 수 있는 쿠키 영상이 있다면서 나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쏟아지는 매트리스의 글자들처럼 수없이 올라가는 크레디트들을 보며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이런 엔딩이 다 있어. 영웅영화는 보통 영웅들이 이기는 거 아니었나. 그 사단을 내놓고 타노스라는 작자는 무슨 필리핀 라이스테라스 같은 산골자기로 가서 혼자 뭐 하는 거야.’


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엔딩크레디트의 수많은 글자들 중 눈에 확 띄는 부분이 마치 0.5배 속도로 느리게 보기로 재생되듯 눈에 띄었다.


“Philippines

Production Service by Indochina Productions, Location Manager, Drone Pilot…“


순간, 설마 했던 것이 정말인가 싶었다. 마지막 1 - 2분 정도 천천히 스쳐 지나간 타노스의 휴식공간이 꼭 필리핀 바나우에 지역의 라이스테라스와 묘하게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벤저스의 공간이 굳이 지구일 필요는 없으니 필리핀의 논을 생각하는 건 너무 뜬금없는 것 아닌가 생각하던 차에 정말로 필리핀이 눈에 띈 것이었다. 과연 타노스가 핑거스냅을 날리고 휴식을 취하던 그곳은 어디였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필리핀은 섬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쪽빛 바다와 온화한 기후로 동남아의 대표적인 휴양지의 이미지를 그리기에 적합한 섬들 말이다. 그런데 사실 섬이라는 것이 조금 평평하고 넓으면 평지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조금만 더 높아지고 올록볼록해지면 산들이 된다. 그래서 무려 7천여 개의 섬들로 이뤄진 필리핀에는 운동장만큼 작은 무인도부터 무려 대한민국만큼 큰 사이즈의 섬들이 공존하며, 그 섬만큼이나 산도 많다.


믿기 어렵겠지만 필리핀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존섬 (109,965 km2 (42,458 sq mi)) 하나의 면적이 남한의 전체면적 (100,363 km2 (38,750 sq mi)) 보다 더 크다 (다만, Luzon은 지리학적 명칭으로 섬을 의미하는 경우 마닐라가 있는 루존섬 자체를 의미하고, 행정구역상의 명칭으로 사용하면 주섬인 루존섬을 포함한 부속섬인 팔라완과 민도로섬까지 포함된다).


지도를 보면 루존섬이 설마 그렇게까지 큰 섬인가 싶은데 그럼에도 정말로 큰 이유는 루존섬은 칠레처럼 기다랗기만 한 것이 아니라, 루존섬의 가장 남쪽인가 싶은 바탕가스 지역에서 옆으로 다시 길게 뻗어가 레가스피라는 주도시가 있는 비콜지역까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루존섬 지도(출처: Freeworldmaps)


이렇게 지도로만 보면 잘 와닿지가 않을 수 있으니 일반 현지인들이 타고 다니는 고속버스 시간으로 설명해 보겠다. 마닐라 지역의 강남터미널 같은 퀘존시티의 쿠바오 버스터미널에서 차를 타고 루존섬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도시 라왁(Laoag)을 가면 약 8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반대로 같은 쿠바오 터미널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도시 레가스피(Legazpi)까지는 약 12시간이 걸리니, 필리핀의 루존섬이 얼마나 길고 거대한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 기준이다).


이렇게 생각보다 큰 필리핀의 크기도 새삼 놀라운 내용이겠지만 한 가지 더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보통 세부나 팔라완처럼 특정 섬으로 휴양을 많이 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겠지만, 필리핀은 그 큰 섬의 크기만큼이나 응집한 높이의 산들도 많다는 것이다.





화산으로 유명한 필리핀만큼 90년대 대폭발로 세계적 이름을 알린 루존섬 중부의 피나투보 화산, 마닐라 관광을 갈 때 많이 들리는 화산호 안의 또 다른 화산으로 유명하며 가장 최근인 2020년에 폭발을 일으킨 탈화산, 그리고 루존섬 가장 남쪽의 가장 완벽한 형태의 화산으로 필리핀 화폐에도 그려진 마욘화산까지 루존섬 하나만 해도 벌써 유명하며 여전히 활발한 활화산인 산들이 섬의 형태를 따라 이어진다.



가장 아름다운 비율을 가지고 있다는 마욘화산



그중 루존섬의 가장 높은 산은 루존섬 중북부에 위치한 풀록 산 (Pulog)인데 무려 2922m의 높이로 남북한을 합쳐 가장 높다는 백두산보다 약 200m가 높다. 그럼에도 플록산이 필리핀에서 가장 큰 산은 아닌데 필리핀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필리핀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민다나오섬의 아포산(Apo)이다. ‘아포’는 할아버지 혹은 정령이라는 뜻으로 산들의 할아버지 혹은 정령으로 불린다. 아포산은 풀록산보다 약 30m 높은 2954m으로 필리핀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이마저도 거대한 화산폭발 후 화산의 일부가 날아가서 낮아진 높이라고 한다.



필리핀에서 가장 높은 산들의 할아버지 아포산



따라서 필리핀(조금 넓게는 동남아 일부 국가들)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 익숙한 마닐라나 세부, 다바오처럼 해안가를 중심으로 번영한 도시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높고 거대한 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들까지 살펴봐야 필리핀의 숨겨진 모습들을 이해하는데 좋은 열쇠가 된다.  


이 열쇠를 우연히 얻게 된 것은 바로 인류학 수업에는 ‘도시인류학’이라는 수업 덕분이었다. 수업을 들으며 필리핀이라고 하면 떠오르던 익숙한 이름들이 생각해 보니 모두 바다와 연결되어, 필리핀 하면 바다와 섬만을 생각해 놓친 부분이 많이 있었구나를 깨닫게 된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필리핀의 잘 알려진 도시들에 이어 현지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만 외부인들에겐 아는 사람만 아는 지역의 다른 도시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루존섬 지도(출처: Freeworldmaps)


필리핀의 대표적인 산지역의 도시는 바로 바기오 (Baguio)이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마닐라 지역부터 다구판(Dagupan)이라 불리는 지역까지는 연두색의 제법 평평한 지형이 이어지다, 갑자기 바기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루존섬 북쪽까지 짙은 녹색의 산맥들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바기오가 이런 평지와 산지를 이어 발전한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도시가 알려진 이유가 있다면 필리핀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선선한 날씨 덕분에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어린 나이부터 어학연수를 하러 많이 가는 곳이라고 한다. 또한 이런 이유로 필리핀 현지인들에게 바기오는 시원한 휴양도시로 유명하다.


기후대는 열대지역이지만 바기오의 고도는 1540m로, 약 1200m 정도 되는 대관령의 높이는 훌쩍 넘고 약 1900m 정도 되는 한라산보다는 낮아 가장 추울 때는 12 - 15도까지 떨어져 비가 오는 날이면 실제 체감온도는 더욱 내려간다. 1500m대에 위치한 바기오만 해도 이 정도로 추운데, 이보다 훨씬 높은 2000m부터 3000m대 사이에 위치한 산골마을들을 여행한다면, 과연 이곳이 정말 필리핀인가 싶을 정도로 시원하다 못해 이가 시린 느낌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처음 필리핀의 바닷가 도시들만을 여행했을 때는 쇼핑몰의 옷가게를 채운 가을, 겨울 옷들을 보며 도대체 누가 이런 옷들을 사 입을까 싶었는데, 북극한파처럼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필리핀 도시의 에어컨과 더불어 필리핀에도 이렇게 높은 산들이 있고 또 그곳에는 작지만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 가을 겨울 옷들을 한두 개 집어 들지 모른다.


이렇게 필리핀임에도 시원한 기온 덕분에 바기오에서는 바나나나무뿐만 아니라 푸르른 소나무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이곳에서는 필리핀의 다른 더운 지역에서 놀러 온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이 소나무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종종 마주할 수 있다.



바기오의 키 큰 소나무들


더불어 바기오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산골짜기 마을들에서는 우리나라의 강원도처럼 고랭지 작물들을 대량 생산하는데, 그래서 바기오의 로컬 시장을 가면 바나나나 망고는 물론 구아바와 딸기, 오렌지 등 각종 과일과 야채들을 신선하게 구매할 수 있다.


이렇게 열대지역임에도 시원한 매력 덕분에 바기오는 현재의 필리핀 사람들 뿐만 아니라 과거 속 사람들, 특히 필리핀을 점령한 스페인 시절부터 식민통치 하는 사람들의 휴양지로 사랑받았다.


사실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지역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관광객들 말고 현지인들이 자주 가는 휴양지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나라들인 인도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을 여행하면서 나는 종종 이 질문을 현지인들에게 묻곤 했는데, 모두 무더운 날씨를 갖고 있는 공통점 때문인지 예상과는 달리 내가 알고 있던 유명한 관광지들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현지의 산악도시들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바로 식민지배 시절부터 이어졌다는 것을 그 나라의 대학에서 도시인류학을 공부하며 처음 알게 되었다.


유럽과는 달리 햇살이 많을 뿐만 아니라 많아도 너무 많은 탓에 식민건설을 하던 유럽인들은 가장 무더운 시절 그 더위를 피할 곳으로 높은 산속 마을을 찾았다. 그곳에 자신들만의 별장을 짓고 무더운 여름 날씨를 피하거나 사람들이 많은 도시에 역병이 들 때면 피신을 하던 것이 규모가 커지고 돈이 들어서며 산악 지역의 휴양도시가 시작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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