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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Mar 21. 2023

인류학 현지조사 중 사랑에 빠지는걸 조심하라고?

필리핀 고고학의 아버지

크리스마스가 끝나자마자 대학원의 2학기가 시작됐다. 한국이었다면 2달 정도 여유 있게 겨울방학을 보낼 것 같은데 필리핀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학교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가톨릭 달력에 맞춰진 듯 방학을 맞이하는 것 같더니, 성탄절이 끝나고 몇 주가 지나니 여긴 겨울은 없으니 겨울방학은 무슨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바로 2학기 등록기간이 찾아왔다.


이번 학기에 내가 들어야 하는, 인류학과에 들어오기 전에는 듣게 될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던 과목 중 하나는 바로 고고학이었다. 인류학과의 필수전공과목에는 언어인류학, 에스노그라피, 체질인류학, 고고학, 그리고 리서치 방법론과 이론이었는데, 모두 인류학과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필수 전공과목이었다.


첫 학기에 들었던 언어인류학 역시 도대체 왜 내가 이 과목을 들어야 하나, 왜 언어인류학은 인류학의 필수전공과목인가 투덜거리면서도 궁금해했었는데, 수업을 다 듣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된 과목이었다. 고고학도 그렇게 되길 바라고 기대하며 수업을 신청했다.


고고학은 지역과 학풍에 따라 어떤 곳은 인류학과는 별개로, 독립적인 학과로 나뉜 곳이 있는 반면 어떤 곳은 인류학과 안에 들어가 있기도 한다. 보통 영국의 학풍을 이어받은 곳은 고고학과가 따로 존재하며 미국의 영향을 받은 곳은 인류학과 안에 고고학을 포함한다고 했다. 보통 인류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고고학자들처럼 땅을 파는 일을 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따진다면 그 사람들의 상상이 전부 틀린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필리핀 국립대학의 경우, 스페인의 식민 통치가 끝나고 미국의 지배로 넘어가던 시기인 1900년대 초기에 세워진 대학이라, 인류학과 역시 미국의 학풍을 받아 고고학을 인류학의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물론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기 이전,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필리핀에 도착하여 지금의 필리핀 영역을 지배하기까지, 그 당시 다른 수많은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듯 스페인 역시 새로운 식민지에 대한 현지 문화와 언어를 조사하는 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하지만 스페인 식민정부에 의한 필리핀의 고고학적 연구는 특별히 기록된 것이 없었는데, 이러한 필리핀의 고고학 기초를 다진 사람이 바로 미국에서 건너온 인류학자 헨리 오틀리 베이어 (Henry Otley Beyer)이다.


헨리 박사가 필리핀으로 넘어온 시기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말 혼란과 새로운 모험들이 가득한 시기였다. 1900년대가 열리며 타국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는 유럽대륙에서 새로운 신생대국으로 커가는 미국까지 퍼졌다. 19세기 막바지에 힘겨운 남북전쟁을 끝내고 가장 젊고도 강한 나라로 태어난 미국은 20세기가 시작되며 미주대륙을 넘어 새로운 대륙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탐험을 떠났고, 그 선발대에는 많은 인류학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인류학의 고전 중 일본에 대해 가장 객관적인 명저로 잘 알려진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라는 책도 원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순수한 인류학적 호기심에서 기록되었다기보다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전 세계로 영향을 확대하면서 전쟁을 통해 만나게 된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기기 위해 타국을 이해하고자 작성된 인류학적 보고서였다. 루스 베네딕트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본으로 직접 가서 현지조사를 할 수 없었던 반면, 헨리 박사는 필리핀의 다양한 장소들에 직접 방문해서 진행할 수 있는 현지조사들에 파견되어 인류학적 연구를 실행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 필리핀으로 파견되었던 시기는 필리핀 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파란만장한 영웅들의 시기였다. 인류의 시간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1895년부터 1905년까지 약 10년 사이, 우리나라가 을미사변과 갑오개혁, 아관파천을 연달아 겪고 광무개혁으로 독립국으로의 마지막 염원을 불태우던 때, 바다 건너 필리핀에서는 국제정세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읽은 필리핀 독립운동가들이 스페인도 미국도 아닌 드디어 필리핀 사람들이 통치하는 독립국가를 꿈꾸며 투쟁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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