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꿈
남편에겐 꿈이 있다. 바로 고양이가 되는 것이다. 아참, 그냥 고양이 말고 독일 고양이나 스위스 고양이다. 다른 몇몇 나라들을 여행하고 난 뒤 덧붙인 조건이었다. 그런데 겨울에는 특별시즌으로 잠시 꿈이 바뀐다. 일본원숭이로. 이것도 그냥 일본원숭이 말고 일본 온천 원숭이다.
남편의 이런 꿈들을 듣고 있으면 연애초기 그의 모습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났다. 국제개발 엔지오에서 일하다 인류학까지 공부하던 와중에 만나게 된 그. 그런 나에게 꿈이 뭐냐 묻길래 세계평화라 했더니 너무 이상적인 꿈이라며 당황해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해태나 세일러문이나 꿈속에 있는 건 똑같은데, 누가 누구의 꿈보고 이상적이라 하는지 ㅋ
필리핀에서 공부할 때는 캠퍼스마다 캠퍼스 대표 고양이를 따로 뽑아야 할 정도로 고양이들이 많았다. 캠퍼스 복도를 걷다 보면 학생들 사이로 걸어 다니는 고양이는 물론, 수업 중에는 고양이들이 가끔 창문을 넘어 교실로 들어와 학생들 의자 아래를 지나가다 수업하고 계시는 교수님 앞으로 걸어가 몸을 부비는 고양이들도 몇몇 있었다.
그렇게 필리핀에 살 때는 고양이가 거의 망고랑 아보카도처럼 흔해서 별 관심이 없었는데 남편을 만나고 남편이 고양이 언어를 설명해 주고 동영상들을 보여주며 고양이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던 참이었다.
남편이 보여주는 고양이 동영상들 중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가끔은 도대체 왜 저러나, 정말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싶은, 질문이 통하지 않는 고양이들의 엉뚱한 행동들이었다. 보통은 이유가 있어야 하고, 의미를 찾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나와는 전혀 다른, 반대의 의미 없는 행동들로 시간을 보내는 고양이들의 모습이 신기하게도 힐링이 되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누운 침대 위에서 평소처럼 잠을 자기 전 인스타를 보다가 귀여운 고양이가 뜨길래 남편에게 보여주려고 고개를 돌려보는데, 남편의 표정이 밤 11시가 아니라 아침 11시처럼 무척 심각해 보였다.
뭔가를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 그의 시선을 따라 그의 핸드폰 화면을 보니 밥알보다 작은 글씨의, 종이로 보나 핸드폰화면으로 보나 똑같이 건조하게 생긴 학술 페이퍼가 눈에 띄었다. 글씨가 어찌나 작은지 정말 코를 화면 앞까지 가지고 가야지 비슷한 알파벳 때문에 헷갈리던 글자가 독일어인지 영어인지 분간이 갈 정도였다.
도대체 잠자기 전에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읽어야 할 학술적 페이퍼는 무엇이란 말인가. 가끔씩 이런 일이 있긴 했는데 오늘은 또 무슨 페이퍼를 읽는지 궁금해 물었다.
“무슨 페이퍼를 자기 전에 읽는 거야?”
“Procrastination에 대한 페이퍼야. “
순간, 생각보다 긴 영어 단어에 당황했다.
“프로 뭐라고?”
내가 잘 알아채지 못하자 남편은 이 단어를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고, 그 설명이 끝나고 나자 절대 풀리지 않을 것처럼 엉켜있던 목걸이가 풀고 나서 보니 평범한 실타래였을 때처럼 프로 뭐시기를 가만히 듣고 나니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단어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결국엔 뭔가를 미루는 걸 말하는 거지? Delay, postpond, put off 등등등이랑 비슷한 의미 아니야? 쉬운 단어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그 프로스티-“
“프로스티 뭐가 아니고 프로크라스티내이션”
“아 그래, 프로크라-뭐라는 그 어려운 말을 굳이 쓰냐고.”
“어려운 단어가 아닌데.”
끙. 할 말이 없었다. 모음 세 개가 넘어가면 나에겐 발음들이 뒤엉퀴는 어려운 단어가 된다. 어쨌든 의미를 알고 나니 단어발음의 굴레에서 벗어난 질문의 본질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 학술적 페이퍼를 왜 이 밤에 자기 전에 읽고 있냐고.”
그랬더니 남편이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뭔가 미루는 습관이 생기는 것 같아서 그렇지 않으려고 읽는 거지.”
‘아. 그렇구나.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싶어서 그렁 학술적 페이퍼를 이 밤에 자기 전에 읽는구나…
응?????’
순간 나도 모르게 폭소가 터졌다. 뭔가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생각할수록 더 웃긴 난감한 상황. 무엇이 나를 웃게 만들까 생각하다 조용히 남편에게 물었다.
“그 페이퍼를 읽는 시간에 차라리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어떻게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을 수 있을까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옆에서 그 깨알 같은 글자들을 하나하나 심각하게 읽는 것이 흡사 웬만한 업무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여서, 저 정도의 노력이면 해야 하는 일을 해내고도 남을 것 같은 분위기에 나도 몰래 머릿속으로만 생각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ㅋㅋㅋ
남편도 뜨끔했는지 둘이 잠시 파안대소를 터트렸지만, 이내 남편은 다시 진지하게 읽고 있던 페이퍼로 눈길을 돌렸다.
고양이가 그렇게 좋으면 한마리 키우는 것은 어떻냐고 물으면 고양이가 되고 싶은 것과 키우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말하던 남편.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정말 남편은 이렇게 가끔 고양이가 되려고 그랬나보다. 엉뚱한 고양이 영상들을 보며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걸까 궁금했었는데, 바로 내 옆에 가끔씩 그런 엉뚱함을 선사하는 남편이 있었다.
고양이가 되고 싶다는 꿈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요즘은 가끔 남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꿈을 이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가끔 고양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