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바다
내가 보덴제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월든이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무려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뒤, 물질적인 것만을 탐닉하는 문명세계를 뒤로 한채 고향 근처의 호숫가로 돌아간 월든이 바로 호수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호숫가의 숲 속에서 작은 오두막을 한 채 직접 짓고 자급자족을 하며 약 2년여 남짓을 살았다고 하는데 내가 보덴제 근처에서 살게 될 시간이 딱 2여 년 정도라고 들었다.
내가 보덴제를 상상하며 순간 월든을 떠올린 것은 순전히 호수라는 공통점 하나 때문이지만, 그만큼 나에겐 호수는 내가 읽었던 책 외에는 다른 특별한 추억이 떠오르지 않는, 낯선 장소인 듯했다.
독일에 와서부터 나는 없던 알레르기가 생겼는데 여러 의사들을 찾아다녔지만 딱히 몸에 맞는 약을 찾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몸과 체력이 변한 것도 무시 못할 이유겠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있었다.
내가 한 곳에 오래 눌러살다가 독일에 온 것도 아니고,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동북아시아 등 제법 여러 대륙을 머물러다녔음에도 한 번도 생기지 않았던 알레르기가 유독 독일에 와서 심해졌다는 것이 나에겐 큰 의문이었다.
그렇게 여러 병원들을 돌아다니다 가장 마지막에 만났던 의사 선생님이 하셨던 말이 기억에 남았다. 나의 코와 관련된 알레르기는 이런저런 약물을 사용해 본 끝에 아무래도 바닷물이 그나마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말을 하셨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동안 돌아다녔던 곳들이 분명 서로 다른 대륙이었긴 했지만 모두 바닷가 근처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는 목포에서 나고 자라 케이프타운, 마닐라, 그리고 베를린으로 넘어온 것이었는데 베를린에만 없는 것이 바로 그 바다였다.
그렇게 나는 알게 모르게 아무리 돌아다녀도 항상 바다 근처에서 살아왔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자연스레 내 인생에 있어 호수에 갈 일은 적었다는 것을 새삼 보덴제로 떠나기 전에 알게 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보통 드넓고 시원한 바다가 좋았고 산에 가면 끝없이 흐르는 계곡이나 폭포가 좋았지 같은 장소에 그대로 고여있는 호수 같은 곳을 굳이 더 찾아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삶에서는 호수라는 장소가 직접적으로 엮인 경험은 거의 없었는데, 반대로 그런 부족한 경험이 오히려 잘 모르고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환상 혹은 동경을 만들기도 했는데, 바로 월든이라는 책이 거대한 동기였다.
보덴 호수 근처에서의 삶을 떠올려보며 오래전에 읽었던 월든을 다시 한번 꺼내 보는데, 가장 첫 1장에 소로우는 월든 호숫가의 생활기를 읽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남의 생활에 대하여 주워들은 이야기만을 하지 말고 자기 인생에 대한 소박하고 성실한 이야기를 해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
월든, 1장 숲생활의 경제학 중
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고 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라는 부탁이었는데, 인상 깊은 것은 뭔가 화려하거나 특별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성실하게, 즉 꾸준히 나눠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문득 그의 부탁 안에 호숫가와 바닷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의 차이가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바닷가 근처를 오랫동안 살아온 나에게 바다란 언제나 저 바다 끝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궁금한 미지의 세계, 그래서 언제나 알 수 없지만 흥미로운 곳이었다. 잔잔한 잔물결만큼이나 휘청이는 파도가 밤과 낮처럼 시간을 나눠 가져서, 모든 것을 뒤덮고 흩어 버리는 풍랑 뒤에 다시 찾아오는 평안함이 혼재해 잔잔한 일상만큼이나 특별한 사건이 언제나 찾아오는 장소였다.
그러다 호수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은 잔잔함뿐이었다. 나는 호수 때문에 쓰나미가 오거나 싸이클론, 태풍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아직까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호수를 떠올리면 나는 자꾸 호수가 아닌 저수지 혹은 댐이 생각이 나서 그 물체는 멈춰있고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렇게 나에게 호수란 잔잔하면서도 한편으론 고요하고 재미없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소로우의 월든 호수를 읽으며 처음으로 호수가 사람들이 살아가고 수영을 하며 낚시를 하고 오두막을 지어 자급자족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생명이 들어있는 공간으로 이미지를 바꿔주었던 것 같았다.
아직 가본 적이 없는 보덴 호수는 소로우가 살았던 월든 호수와는 아마 닮은 점도 또는 다른 점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서 삶을 살아낸 방식은 19세기말, 그 당시 사람들에게도 주류가 아니었던 자연 그대로의 방식으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기에, 약 200여 년이 지난 지금 내가 보덴 호숫가에서 마주하게 될 장면들이 책에서 읽은 내용들과 자주 겹칠일은 없을 것이란 상상도 함께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보덴 호수 근처에서 살게 될 2년간의 삶을 준비하며, 월든 호수에서의 소로우의 삶을 나의 삶에 접목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가 부탁했던 것처럼 화려하지 않고 특별한 것이 없어도 내가 직접 보고 듣고 가본 보덴 호수 근처의 삶을 '소박하지만 성실하게' 기록해 보는 것이다. 보덴호수의 소박하지만 성실한 일상의 기록은 어떤 장면과 사람들로 채워질까? 2년 뒤의 일기장이 궁금해지는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