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 없던 여행

인연이라는 것

by 따뜻한 선인장


인연이라는 것


"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 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해도 달아날 수 없고잉. 지금 너한테로도 누가 먼 길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 앉겄지. 물 한 모금 달라고."

- 최명희, 혼불 중 -


언제부터 인가 계획이 틀어지면, 불안하거나 짜증 나기보다는 이 계획이 아니면 어떤 계획이 펼쳐질 것이기에 이렇게 틀어지게 된 걸까, 기대하게 되었다. 격동의 이십 대가 남겨준 선물인지도 모른다. 필리핀에 오래 있다 돌아온 집에서 엄마는 나에게 한소리를 하셨다. 예전에는 그렇게 계획적이었던 아이가 왜 이렇게 계획 없이 말하냐고.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한 때는 정말이지 섬세하게 계획을 짜고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또 계획을 세우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계획을 세우면 세울수록 인간들은 신기하게도 인생은 계획대로만은 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배우는 쳇바퀴 안에 들어서게 된다. 그렇게 열심히 쳇바퀴를 굴리는 데만 이십 대의 초반을 거의 소진하고, 이젠 쳇바퀴 안 굴릴 거야 단단하게 마음먹고 쳇바퀴 대신 길을 찾고 걷는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새 서른 살이 되었다. 여전히 계획 없이 사는 것이 가끔은 짜증 나거나 두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또 설레고 궁금해지는 걸 보면 그래도 이십 대 후반을 나름 탄탄히 살아온 것 같았다.


원래는 학기도, 논문 발표도 다 끝나면 필리핀 유학생활과 더불어 인류학 대학원 강의 쫑파티로 피렌체를 가려고 일 년 전부터 준비한 터라 그 사이에는 어떠한 여행도 계획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정말이지 필리핀의 부활절 연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나긴 무의 시간이다. 상점과 회사, 모든 곳이 문을 닫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거의 일주일을 차지한다. 1억이 넘어가는 북적북적한 필리핀 거리도 이 부활절 연휴 기간에는 좀비 영화에서 볼 수 있을 만한 텅 빈 적막한 거리로 바뀐다. 그렇게 고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부활절 전 주부터 갑자기 식단을 채소로만 채우려고 부단히 노력하기도 한다. 가뜩이나 우기철 습도처럼 우울한 분위기가 모여있는 논문 발표 전 달인데, 가만히 있으면 계속 논문 생각이 나서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렇게 계획에도 없던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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