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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폐인작가 Sep 21. 2023

[매니저와 꼰대 사이] 고인물 (하)

한 곳에 고이면 썩는 게 아니라 당연해진다.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다. 독박육아에 지친 여자와 수험생활에 질린 여자.
같은 지역에 살아도 전혀 마주친 적 없던  두 여자는 비슷한 시기에 같은 목표를 꿈꾼다.



탈출하고 싶다.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지옥에 갇혀있던 나는 구직사이트를 열심히 뒤적였다. 역시 내가 들어갈 만한 곳은 없다.날 부를 곳도 없다. 몇 날 며칠 의미 없이 마우스만 움직였다.


[가족처럼 같이 일할 분 구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 마음을 자극하는 문구를 만난다는데, 난 이제 막 개업하는 카페 아르바이트 공고에서 마주쳤다.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그건 정말 강한 이끌림이었다.

일을 손에 놓은 지 2년 흘렀지만, 같은 계열 카페의 다른 가맹점이었기에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험생활로 인해 멈춘 삶에 숨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돈을 벌고 싶었다. 생판 남에게 처음 인정받았던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이보다 훨씬 어렸던 그때도 내세울 만한 건 없었다. 그런 나를 생소한 카페의 세계로 이끈 건 남자사장이었다.


‘카폐인아, 난 네가 일주일 후면 나갈 줄 알았다.’


내가 일한 지 100일이 지났을 무렵 남자사장이 말했다. 남자사장은 면접볼 당시에도 채용후 같이 일할 때도 한 동안 날 믿지 못했다고 했다. 금방 관둘 줄 알았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납득했다. 누가 봐도 나는 눈치도 없고 몸은둔했고 손은 굉장히 느렸다. 손님을 대할 때도 말을 더듬고 식은땀을 흘렀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하루하루 부족한 내 실력에 대한 X 팔림을 참으며 출근했을 뿐인데 신입을 교육할 수 있는 선임이 되어있었다.


1년도 안 되는 짧은 경력 덕분에 나는 그녀를 만났다.


‘사장’이란 직함을 처음 단 그녀와 개업한 카페의 첫 멤버인 나. 우린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가게를 키워나갔다.

나는 당연히 자릴 지켰다. 초반 몇 개월은 도왔다는 게 맞는 표현일 거다.

창업과 관련된 일이 서툴렀던 사장님에게 카페 레시피와 손님응대 및 청소를 전부 알고 있던 나는 든든한 지원자였다.  사장님이 날 인정해 주는 말을 한 번씩 해줄 때면 자부심을 느꼈고, 은연중에 당연히 나는 이 가게에 없어선 안될 존재라고 생각했다.


평일주말 할 것 없이 사장님은 날 찾았다. 내 능력이 남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 여겼다. 힘들었지만 진심으로 즐겁게 일하고 또 일했다. 그건 사장님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에서 직함을 달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육아에 지친 사람에겐 삶의 활력소였다. 그리고 사장님도 당연하다는 듯 일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할 때면 날 먼저 찾았다.


우리 사이에 당연함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월급 주는 사람 마음이죠, 뭐.”


퇴사 통보를 받은 호두가 행주로 주방 테이블을 닦았다. 호두는 파트타이머였지만 일에 대한 열정이 넘쳤고 책임감이 강했다. 장사가 비수기에 접어들자 직원 수를 줄여 나가야 했다. 그 대상은 호두가 되었다. 아직 한 달가량의 시간이 남았지만 호두는 이미 여기에 대한 미련은 없어 보였다. 더 이상 일할 마음이 사라진 거다.

나는 예약된 이별이 씁쓸했다. 잘 맞는 동료를 드디어 찾았다 생각했는데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비가 오면 출퇴근 시간을 조정해 인건비를 조정하는 사장의 운영이 너무하다 느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난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호두의 말대로 월급 주는 사람이니까, 날 채용한 고용주니까 당연히 말을 들어야 한다 여겼다.

하지만 동료들에게 당연함이란 없었다.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에 대해 불쾌함을 드러내는 동료들을 보며 나도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돈을 준다고 해서 내 시간을 마음대로 여기는 건 당연한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오래 일한 동료들이 떠나는 걸 붙잡을 수 없었다. 그들이 떠나는걸 오히려 응원했다.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그들이 한 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난 여기에 너무 익숙해졌다.

다른 곳으로 갈까? 그럼 어디로?


일과 돈으로 얽힌 서로가 알고 지낸 시간이 오래되니 오히려 이 될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편해져 나태하게 굴 때면 사장님은 실망하면서도 싫은 소리를 잘 못했다. 나는 몇 번 더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고 변명하는 못난 모습을 보였다. 그럴 때면 사장님은 좋게 넘어갔다. 그 모습에 ‘나라면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하는 무례한 착각에 빠졌다. 매니저가 된 후 아르바이트생인 땅콩을 만나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나는 양쪽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해가 지날수록 서로의 가치관과 신념은 달라진다.


‘네가 불편해’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사장님의 목소리에 나는 무덤덤했다. 나는 더 이상 사장님이 원하는 카페 이미지에 맞는 직원이 아니다. 첫 날 만났던 우리는 이제 없다. 결국 사장님과 나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김밥집‘에서 일하는 건 어떨 거 같아?라고 제안한 사장님의 의도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내 나이에 어울리는 일을 하길 원한 걸까?


우리 사이에 ‘당연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사장님도 서로 대체될 수 있는 관계다. 딱 이 정도의 거리. 서로 필요하면 도움을 줄 수 있는 그 정도. 나는 여전히 카페 매니저다. 하지만 앞으로 카페 근무시간은 줄어들고, 관리만 하게 되며 김밥가게에서 장시간 일하게 된다. 사실,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처럼 떠날까 싶다가도 계속 남아있는 건 일에 대한 익숙함과 그동안 쌓아온 믿음과 의리 때문이다. 알아온 세월만큼 서로의 사정을 어느 정도 봐주게 된다.

하지만 난 여전히 끌려 다니는 입장이라, 항상 헤어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아직 몸을 움직이는 일이 재밌다.

한 번씩 싫을 때가 있고  불편한 사장님이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매일 반복되는 일로 인해 번아웃이 왔을 때,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글 쓰는 행위가 삶을 살아가는 힘을 준다. 그래서 브런치라는 기회가 주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 못다 한 카페에 관한 이야기와 제2의 직업이 될 김밥이 나를 또 어떤 글쓰기로 이끌어줄지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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