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마지막 날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인데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밤새 이상한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나는 벽에 박혀있는 선반처럼 붙잡혀 있었다. 꼼짝할 수 없어서, 그래서 더욱 움직이려고 발버둥 치다가 잠에서 깼다. 잠들면 나를 속박하는 것이 벽이 아니라 의자나 가구로 달라질 뿐,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걷는데 꿈처럼 몽롱했다. 커피가 간절히 필요했다. 잠을 잘 수 없는데, 커피가 필요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입안에서 단내가 났다.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거대한 침묵에 압도당했다. 새벽까지 비가 와서 하늘은 우중충했고, 공기는 납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침묵. 입을 딱 닫고 있는 연인의 입처럼 책은 좀체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커피를 내렸다. 빈속에 커피를 마시는 건 안 좋은 버릇인데 좀체 바꿀 수 없었다. 커피를 홀짝이며 서재를 서성였다. 그리고 몇몇 책을 펼쳤다. 책을 펼치면 침묵하고 있던 책이 떠벌리기 시작한다. 소설은 참으로 수다쟁이다. 이야기를 끝없이 쏟아낸다. 쏟아진 이야기는 건축물처럼 차곡차곡 쌓아진다. 결국 내가 읽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우연의 연속인 것만 같은 삶이 누군가 만들어 놓은 건축물처럼 느껴진다.
시는 말을 아낀다. 시가 하는 말을 알아들으려면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소리도 작아, 고양이처럼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문제는 귓바퀴에서 증폭되어 머릿속에서 굉음처럼 울린다는 것이다. 아주 짧은 문장에서 삶을 송두리째 뒤집는 천둥 같은 소리가 난다.
수필은 솔직한 친구와 나누는 대화 같다. 하지만 단점은 솔직하지만 너무 꾸민다. 세상의 이치를 죄다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겸손한 척하지만 가장 자존감이 강하다. 그래서 세상을 자기 관점으로 멋들게 해석한다. 그들의 해석이 가끔은 거짓말 같지만, 어쩐지 믿고 싶어지고 믿으면 삶에 도움이 된다. 삶에 대한 관점은 해석의 영역이지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수필은 수필만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책은 펼치지 전까지는 침묵한다. 침묵은 책의 덕목이다. 내가 필요할 때만 이야기한다. 파스칼 키냐르는'오직 책을 읽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고독한 노래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필요하지 않을 때는 한없이 오랫동안 묵묵히 침묵하다 어느 순간 삶이 힘들고 지루할 때 펼치면 여지없이 어느 한 구절이 나를 위로하고 나에게 해답을 제시한다. 그 고독한 노래는 삶에 대한 심오한 음악이고 경종이다.
내가 펼치지 않는 기간 동안, 그토록 오랫동안 축적된 침묵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러니 내가 책을 펼칠 때 책이 수다스러워지는 건 당연하다. 다만, 내가 그 수다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악을 듣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읽고, 유튜브를 본다. 그래서 정보든, 책이든 내 안에 들어온 것들은 머물 공간이 없이 바로 빠져나간다. 침묵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들을 수 있다. 나는 뭔가를 담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를 차단해야 하고 덜어내야 한다. 무엇일까? 유튜브? 인터넷?
사실, 매체의 문제가 아니다. 대상은 잘못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문제, 또는 작동방식의 알고리즘에 쉽게 빨려 들어간 조급함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단순히 조급함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운 욕망을 기반한 강력한 알고리즘을 어떻게 대항할까? 그래서 더욱 침묵이 필요하다. 서재 앞에 서서 닫힌 책들을 어루만진다. 책의 침묵이 부럽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집중력 부족으로 책을 읽지 못해도 붙잡고 있으면 책의 침묵이 내 안으로 서서히 스민다. 책을 받아들일수록 질문과 의문이 늘어나고, 확신이 부정확해진다. 견고했던 것들이 깨진다. 그 틈으로 더 큰 침묵이 침투하고, 그러면서 공간이 더 넓어진다.
그래서 나는 책을 믿는다. 다른 정보는 침묵이 머물 공간을 쥐처럼 서서히 갉아먹지만, 책은 침묵의 공간을 빵 반죽처럼 넓힌다. 어쩌면 우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