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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Oct 14. 2023

독서모임을 하는 이유

파스칼 키냐르, 비비언 고닉


 ‘자신의 노랫소리에 스스로 빠져드는 새들처럼 독서하는 사람도 자신이 읽어가는 의미로 이동한다.’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 19쪽, 파스칼 키냐르, 송의경 옮김, 문학과 지성사  


 ‘카페 문화가 번창할 때, 말하기는 유연한 지성을 공유하는 행위가 되며, 그 지성은 대화하고픈 욕구를 더욱 커지게 한다. 그럴 때 적절한 문장을 만드는 사람은 좋은 문장을 만들게 되고, 좋은 문장을 만드는 사람은 탁월한 문장을, 탁월한 문장을 만드는 사람은 비범한 문장을 만들게 된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236쪽, 비비언 고닉, 서제인 옮김, 바다출판사

 


 지겹고 힘들어도 독서모임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커피 중독과 닮았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정하고 책을 읽고 후기를 나눈다. 책 후기는 전문적인 지식 공유가 될 때도 있고, 신변잡기식 감상 나누기가 될 때도 있다. 짧은 두 시간 동안 깊지는 않지만 가벼운 친밀감을 공유한다.

 당연하다. 두 시간 동안 대화하고 깊은 공감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함께 읽은 고전의 지루함을 버티고 수수께끼 같은 작품을 풀어내야 하는 수고를 버티더라도 할 말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유명 작가의 책에서 얼토당토 하지 않은  함의를 찾아 우기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기어코 모여서 가볍고 얇은 우정을 쌓는다.

 모임 자체가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리는 분명하게 의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적허영일 수도 있지만, 아니 지적허영이라 해도 상관없다. 독서모임이 만들어내는 묘한 분위기는 우리를 잠깐 시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좋은 문학은 주인공의 삶을 통해서 팍팍한 일상에 묻혀 있던 자신의 존재 소리를 듣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작가의 문장을 읽고 나와의 접촉을 잡아채 내 문장으로 만들어 뱉어낸다. 내 정체성을 이루는 작은 부분을 떼어내어 문장으로 만들고, 그 문장을 받은 사람은 자신과 퍼즐이 맞는 문장을 내어놓는다. 퍼즐은 아귀가 잘 맞을 때도 있고, 어긋날 때도 있다. 분명 우리는 다르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는 함께 읽은 책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책과 공명한 내 부분을 이야기하고, 상대도 책에서 공명하고 느낀 부분을 말한다. 우리가 서로 다르더라도, 그 중간에 있는 책과 공명한 부분은 아귀가 비교적 잘 맞는다.

 모이는 사람이 비슷하고 똑같아서가 아니다. 자세히 보지 않더라도, 평소 생각도 다르고 삶의 형태와 가치의 우선순위도 다르다. 경제적인 면도 당연히 다르다. 그런데도 신기하게도 짧은 시간 함께 읽는 책이 우리는 비슷하게 만든다. 책을 깊이 읽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읽어가는 책의 의미로 이동하다. 우리는 함께 이동하는 것을 느낀다.

  ‘자신의 노랫소리에 스스로 빠져드는 새들처럼 독서하는 사람도 자신이 읽어가는 의미로 이동한다.’ 

 이동하는 거리, 이동하는 강도가 다르지만, 순간 함께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다른 삶을 향유하며 평소에 떨어져 있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계급이 다르더라도. 각자의 삶, 서로를 지치게 하는 억압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짧고 강력한 일체감이다.

 아. 저렇게도 생각하는구나.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 평소 내 생각과 다르지만, 내 앞에 앉은 사람이 펼치는 논리와 이야기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있다. 저렇게도 생각을 하는구나.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혐오의 대상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 대상을 이해하는 각자의 방식이 한 장소에 펼쳐질 수 있고, 그것을 진지하게 듣게 만드는 건 오로지 책의 공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면, 나에게 내재된  반대 개념을 살피게 된다. 그리고 논리를 재정리한다. 과연 내 논리는 맞는 것인가? 저 사람의 논리에 반대하려면 내 논리가 더 단단해져야 하지 않을까,라고. 완전히 상반된 두 논리와 생각, 그리고 감정이 한 곳에서 모일 수 있는 것도 당연히 책의 공로다.


 책이 아주 조금이라도 나를, 당신을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게 만든다.  

 그러다 비범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튀어나온다. 그러면 저절로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경청하게 된다.

 ‘카페 문화가 번창할 때, 말하기는 유연한 지성을 공유하는 행위가 되며, 그 지성은 대화하고픈 욕구를 더욱 커지게 한다. 그럴 때 적절한 문장을 만드는 사람은 좋은 문장을 만들게 되고, 좋은 문장을 만드는 사람은 탁월한 문장을, 탁월한 문장을 만드는 사람은 비범한 문장을 만들게 된다.’ 

 내가 상대방에 말에 비범함을 느낀 순간, 내가 고집하고 있던 고루한 말들이 혼비백산 놀라면서 흩어진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던, 우리를 둘러싼 모든 논리와 감정들이 재자리를 찾아간다.

 그 과정을 경험한 사람은 똑같은 마음이 든다. 아, 나도 비범한 말을 하고 싶다.

 그러면 역순으로 내려간다. 비범한 말을 하려면 탁월한 문장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탁월한 문장을 만들려면 좋은 문장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좋은 문장을 만들려면 적절한 문장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적절한 문장은 문장을 수집한다고 해서 적절해지지 않는다. 결국 나와 연결이 강해야 한다. 그래서 먼저 나와 연결된 파편의 문장이 내 안에 가득해야 한다.

 나와 공명한 문장들은 결국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고, 그건 나를 이루는 하나의 파편이다. 항상 희망한다. 내 파편들이 발화되었을 때 비범한 문장이 되기를. 이거야말로 내가 원하는 꿈이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예전에는 꿈이 없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꿈이 아닌 것을 쫓으며 자신을 세상의 제도나 구조에 구겨 넣는 것을 꿈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 말이다. 꿈이 없는 것이 꿈이라는 문장이 비범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시 묻는다면, 비범함 문장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찰나, 황홀한 희열의 순간, 서로가 연결되는 기이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순간을 만들어내는, 그런 완벽한 문장을 만나기를. 그 순간을 위해 내 안에 차곡차곡 문장을 쌓고, 중독처럼 독서모임을 한다.


 우리는 안다. 우연이나 행운일지라도, 나도 이미 과거 어느 순간 그런 완벽한 비범한 문장을 만들어냈던 찰나가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함께 책을 읽고 말한다. 다른 비범한 문장을 만나 나의 또 다른 변화를 목도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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