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변신> 100쪽, 프란츠 카프카, 솔
내 안에 가장 크게 차지하고 있는 파편은 프란츠 카프카 소설 <변신>의 첫 문장이다.
‘어느 날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고 가장 탁월하고 가장 비범한 문장이다. 누구나에게 비범한 문장이 되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그렇다. 카프카의 문장으로 인해 내 안에 가득했던 문장이 송두리째 폭발했다. 내가 만들어낸 문장이 얼마나 과대포장되었는지, 수소로 가득 찬 과자봉지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작가를 만난다는 건, 그 작가가 세상을 보던 시선을 내 안에 들여놓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카프카의 시선은 변신의 첫 문장만으로도 내 안에 넘치게 찼다. 어쩌면 이곳에 쓰는 글들은 모두 그의 시선을 빌려 쓴 글일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가 세상을 봤던 시선으로 내 삶을, 나를 둘러싼 세계를 보는 것이다. 이미, 벌써 시선이 되어버린 문장은, 바로 나에게서 뜯겨 나간 파편이 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비범한 문장은 맥락 속에서 이뤄진다. 다른 말로 하면 비범한 문장 앞뒤에 또 다른 비범한 문장이 있다. 항상 거대한 덩어리로 굴러온다. 그래서 위대한 작가는 문장이 아닌 작품으로 말한다.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가 된 자신을 보고 크게 놀라지 않는다(개인적으로는 해충보다는 벌레로 번역하는 것을 좋아한다. 해충은 인간의 생활에 해를 끼치는 벌레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 심지어 자신이 벌레가 된 것이 행복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잠자는 벌레가 될 것을 미리 알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스스로 벌레가 되기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벌레가 되면서 가족으로부터 방에 감금당하고, 나중에는 죽고 버려진다. 벌레가 된 그는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존재였을 때만 환영받던 존재였다. 그렇다면 ‘필요’는 무엇일까? ‘필요’와 ‘불필요’라는 구분은 누가 한 것일까? 나에게 필요하냐, 아니냐의 구분은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조금 깊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속한 사회가 필요와 불필요의 기준을 정하는 것 같다. 우리는 필요와 불필요를 배우고, 필요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는 그레고르 잠자처럼 버려진다. 그것을 잠자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만 필사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필요한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았다. 하지만 더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변신한다.
그런데 그 변신이 하찮은 벌레다.
그는 그 많은 변신체 중에서 왜 벌레가 된 것일까? 그럴싸한 영웅의 모습이 아닌 하찮은 존재로 말이다. 다시 여기에서 경계가 생긴다. 누가 벌레가 하찮은 존재라고 했을까? 벌레도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인 완벽한 존재다. 사회에서 요구한 모습이 아닐 뿐, 벌레도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자신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
삶을 버리지 않고, 사회의 구속과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다. 사회가 그를 필요하지 않아야 한다. 필요의 강요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멀쩡한 상태에서 그 망각한 사회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잠자가 벌레로 변한 것은 자신의 의지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도 아주 강렬한, 혁명적인 의지다. 적당히 사회적으로 환영받는 강아지로 변했다면, 집을 지키거나 애완동물이 되어 사회적으로 요구된 존재가 됐을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벌레인 것이다.
잠자가 불필요한 존재로 변신하는 순간, 가족은 잠자를 버린다. 우리는 필요 없는 존재에 가하는 폭력을 목도하게 된다. 그 폭력은 벌레여서가 아니라 그것을 구분하던 필요와 불필요의 기준에 따른 것이다. 그 기준은 사회가 만들었고, 우리가 용인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을.
자, 여기 우리가 만든 기준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게 해 주는 혁명적인 존재가 있다. 그것은 벌레다. 우리는 벌레를 쉽게 밟아 죽인다. 벌레 죽이기는 사회가 우리에게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따른다. 죽이는 편에 서서 자신이 필요한 사람임을 증명한다.
위대한 작품은 나를 해체시킨다. 나의 위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감싸고 합리화하고 포장한다고 해도, 발가벗긴다. 벗겨진 나는 그때서야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다. 벌레와 가족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지를 말이다. 어느 때는 가족이었고, 그러니까 함부로 폭력을 휘둘렀고, 어느 때는 벌레였다. 벌레일 때는 나을 왜 못 알아주냐며 항변했다. 내 처지와 이익에 따라 나에게 이로운 감투를 썼던 것이다. 변신이 아닌 가면 말이다.
물론 다시 사회 구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합리화하고 나름 멋진 감투를 쓰지만, 그 짧은 자각만으로도 나의 선택 방향이 바뀌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달라진다. 내가 한 선택이 혹여 벌레로 변한 타인을 죽이는 선택인지 이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가끔 외칠 수밖에 없다.
"변신"
마치 어렸을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면 아주 짧은 순간 변신로봇이 되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처럼 나는 조금 강해진다. 세상에 대항할 힘을 얻는다. 벌레처럼 혁명적인 존재가 될 수 없지만, 나도 아주 작은 변신을 한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서점 카프카를 운영하는 것도 변신체 중에 하나이다. 이 변신체는 벌레에 가까운가? 가족에 가까운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끝없이 사회적 관계가 재편성되기에, 끝없이 이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