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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Oct 17. 2023

나와 당신, 그리고 환대

에마뉘엘 레비나스, 강영안


 '타인은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오히려 내면성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이다.' <타인의 얼굴> 37쪽, 강영안, 문학과 지성사



 아침에 설거지를 하다 싱크대에 왼손을 부딪쳤다. 살짝 부딪혔는데도 살갗이 찢어지면서 피가 났다. 자주 있는 일이기에 대충 지열하고 반창고를 붙였다.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약하다. 다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공룡이나 갑각류처럼 갑옷 같은 단단한 살갗을 가졌다면 이렇게 쉽게 다치지 않을 텐데.

 그러면 왜?  

 곧 그 의문에 대한 답이 떠오른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니 당연히 과학적인 답이 아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얼토당토아니한 간지러운 답이다. 그 답은 바로 ‘당신’이다.

 그날은 햇볕이 새벽부터 창으로 강렬하게 들어왔다. 좋은 날이구나.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면서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평화로운 아침. 밖에서는 고양이가 앵앵거렸다. 다른 날은 신경 쓰였는데, 그날은 반가운 인사처럼 느껴졌다. 그래, 너도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오랜만에 아침밥을 차려서 먹었다. 그리고 설거지를 하다 다쳤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다쳤다기보다 상처를 발견한 것이다. 자주 다치던 상처와 다른 상처를. 아픔보다는 상처에서 빛나는 환함을. 완벽한 평온을.  

  

 인간이 살갗이 부드러운 이유는 누군가와 체온을 나누고, 상대를 껴안고 보듬고 쓰다듬기 위해서다. 피부에는 외부의 것을 느끼기 위해서 수만 개보다 더 많은 센서가 달렸을 것이다. 성대가 여러 소리를 낼 수 있게 발달한 것은 당신에게 내 마음을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모든 신체는 오로지 나를 위해서 존재하기보다는 타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서로에게 존재하기 위해서 인간은 이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나답게 산다는 말이 있다. 한동안 비슷한 제목의 책이 출판계를 휩쓸기도 했다. 나답게 산다면 그냥 나답게 살면 되는데, 우리는 기어코 책을 써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에게 지금 내가 나답게 살고 있다고 증명하려고 한다.

 내 손가락이 이렇게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는 이유도 결국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타인에게 비친 내 모습이다. 나답게 살고 싶다는 말이 유행한 것은 역으로 서로에게 존재로 비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나다운 것보다는 사회에서 원하는 모습으로만 치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답게 사는 내 존재가 여기 있다고 외치고 싶은 것이다.

문을 활짝 열어 타자를 기꺼이 환대할 때 진정한 주체가 된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철학자 레비나스가 한 말이다. 진정한 주체, 나다운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요청에 환대해야 한다. 내 존재의 근거는 타인에게 있고, 마찬가지로 나도 타인의 존재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멀게 돌아왔지만 정리하자면, 나는 살짝 부딪쳐도 생채기가 나는 연약한 인간이다. 그건 연약한 타인을 부드럽게 꽉 안을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이유는, 인간이 이렇게 프로그래밍된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이다. 당신이란 타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우리는 혼자라는 자각, 인터넷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로 조용함 속에 갇힐 것이다. 이런 자각은 나름의 통찰을 가져다주지만, 고독의 아픔을 사라지게 만들지는 않는다. 고독과 고요의 조여옴은 뭔가 안절부절못하게 하는, 마치 목이 아파서 물을 삼키지 못하지만 목이 말라 가슴이 조여 오는 상태 같다.

 익숙해질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디어지는 것이고, 무디어진 것은 뜻밖의 상황에서 다시 날카로움을 찾는다. 찔린다. 그리도 다시 무디어진다. 그 반복 속에서 결국 누군가를 찾는다. 바로 당신. 나를 환대하는 당신. 아니, 내가 환대하는 당신.  


 누구도 침투할 수 없는 단단한 바위 같은 나를 만드는 것은 나 답다는 말보다 단절이란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 침투할 수 없는 바위 같은 철옹성은 결국 나다운 나를 만들지 못한다. 침투되고 부서져서 벌어진 틈으로 서로를 만날 때이다.  결국 나 다운 나는 물렁한 살갗을 가진, 그래서 서로 안아서 체온을 나누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이게 나 다운 거야,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들은 타인은 내가 말한 나 다운 나를 생각한다, 추측한다, 추론한다, 그리고 상상한다. 나 다운 나는 내가 말한 나 다운 나로 그대로 전달될 수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 다운 나를 전달하고 상대는 나 다운 나를 자신만의 기준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가 느낀 나 다운 나를 나에게 전달한다. 그건 또 다른 상대의 나 다운 나이다.  나를 전달하고, 타인이 나를 전달받고, 반대로 타인이 나에게 전달하고, 나도 그 타인을 받아들일 때, 나 다운 정체성은 그때서야  내면성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가 된다.  

 알아달라는 말은 공유한다는 말이다. 일방적으로 내가 이렇게 생겼다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환대는 어렵기만 하다. 과연 누가 기꺼이 타인을 조건 없이 환대할 수 있을까? 레비나스의 환대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행할 자신이 없다. 다만, 당신, 오로지 당신에게만은 그런 노력을 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에게 나로 존재하고 싶다면, 먼저 내가 당신을 당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환대해야 한다.

 


 결국, 이 글의 핵심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찾으려고 할수록 더 찾지 못할 수 없는 존재, 완벽한 환대의 대상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내 옆에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환대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그를 환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환대의 대상이 없는 게 아니라, 완벽하게 환대하는 내가 없는 것이다.

 환대하지 못한 나와 환대받지 못한 당신, 반대로 환대받지 못한 나와 환대하지 않는 당신, 이것을 말고 싶은 것이다. 나와 당신에게.

 환대하지 못한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 당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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