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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Oct 18. 2023

자신의 사랑을 사랑하는 사랑

<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멜로드라마처럼 사랑을 도구로 삼아 사랑을 소비해 온 문화들을 우선 사랑의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사랑을 낭만적 영역이라 치부하고 탐구를 외면해 온 시선 역시 사랑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멜로드라마의 세례를 받고서 허구적인 사랑놀음에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사이에, 우리는 그와 비슷한 격정적인 감정만을 사랑이라며 동경해 왔다. 심장이 짜릿한 설렘과 심장이 저릿한 통증을 함께 겪고 싶다고 막연하게 사랑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거기에 어떤 약속과 어떤 책무가 뒤따르는지에 대한 예상은 그다음 순위의 관심으로 미뤄놓지는 않았을까.'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10쪽, 김소연, 문학과지성사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 답으로 많은 사람이 사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을 한 사람에게 사랑의 정의를 묻는다면 딱 부러진 대답을 하지 못할 거예요. 혹여 대답한다고 해도, 개인적인 생각으로 사랑은 이랬으면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납득할 만한 완벽한 사랑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확실한 정답이 존재하기 힘들지만, 중요한 것은 항상 정답 비슷한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항상 오류가 날 수밖에 없고, 그 오류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정의의 한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이 말도 하나의 의견일 뿐입니다. 그런데 의견일 뿐이다, 에서 끝나면 뭔가 허전하고, 때로는 불안합니다. 붙잡을 것이 없는 것을 붙잡기 위해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젓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유는 확실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항상 찾고 항상 사랑을 받고 싶어 하니까요. 존재하지 않은 것 같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정답이 없지만, 분명히 자신에게 맞는 정답 비슷한 사랑을 찾습니다.  그래서 풀기 힘든 문제이지만, 기어코 답을 찾는 여정을 떠납니다. 힘들고 슬프더라도 말이죠.


 그런데 개인적으로 생각한 사랑이란 답이 이상하게 비슷합니다. 정답이 없는데도 정답이 있는 것처럼 공통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이 있죠. 그 사랑이 전통적으로 형성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시대가 원하는 사랑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우리는 텔레비전이나 소설 속 주인공들이 하는 사랑을 시대상의  사랑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대에서 원하는 사랑을 드라마 주인공이 표현하고, 반대로 드라마 주인공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내가 타인에게 그 사랑을 요구합니다.  이 쳇바퀴는 굴러가면서 더 커지고, 더 커진 쳇바퀴는 시대의 사랑과 환상으로 우리를 억압합니다.

 사랑은 이래야 된다는 식으로요.

 나도, 당신도 우리의 상대에게 자주 이것을 요구합니다.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책 제목에는 두 번의 사랑이 나옵니다. 이 두 사랑은 다릅니다. 앞의 사랑이 진실한 사랑이라면 그 안에는 당연히 사랑이 있겠지요. 하지만 포장만 사랑이라면 그 안에는 텅 빈 공허만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욕심과 폭력적인 욕망만이 가득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는 말은 앞의 사랑이 가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얼마나 가짜 사랑을 믿고,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만들어지고, 강요된 사랑인지를 보여줘요. 그래서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강요로 작용하는 허구의 사랑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 책은 허구의 사랑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도와줍니다. 허구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진정한 사랑의 답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허구의 사랑을 피해서 자신만의 사랑을 가질 수는 있겠지요. 정답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사랑, 보기에 너무도 좋고 멋진 사랑을 따라 하는 것은 내 안의 부족한 결핍을 확인할 뿐입니다. 내 결핍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자책감을 가지게 되고, 결핍에 따른 적의도 가지게 됩니다. 영화처럼 너무도 멋진 사랑은 사랑에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멜로드라마처럼 사랑을 도구로 삼아 사랑을 소비해 온 문화들을 우선 사랑의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사랑을 낭만적 영역이라 치부하고 탐구를 외면해 온 시선 역시 사랑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멜로드라마의 세례를 받고서 허구적인 사랑놀음에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사이에, 우리는 그와 비슷한 격정적인 감정만을 사랑이라며 동경해 왔다. 심장이 짜릿한 설렘과 심장이 저릿한 통증을 함께 겪고 싶다고 막연하게 사랑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거기에 어떤 약속과 어떤 책무가 뒤따르는지에 대한 예상은 그다음 순위의 관심으로 미뤄놓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랑을 의심해 보고 당장 멀어져야 한다고요.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면, 첫 번째 사랑과 멀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멀어질 수는 없습니다. 쳐부수어야 할 적으로 간주하더라도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적으로 간주하고 반대의 사랑만 추구하면, 그건 적의 반대 개념의 사랑일 뿐 이 또한 자신의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멜로드라마의 사랑과 대비된 사랑일 뿐이죠.

 먼저 적을 알아보는 해안이 있는 눈을 장착해야 할 것이고, 적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면, 싸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적과 싸워서 쟁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싸움만으로는 폐허만 남습니다. 사랑을 다시 하나하나 차근차근 만드는 일입니다. 우선순위도 정하고요. 매번 상대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상대가 가지고 있는 적으로 치부될 수 있는 사랑과 싸움을 하면서요. 분명 아픈 이별을 하게 될 것이고, 다시 사랑을 하는 것이 두려워질 것입니다. 이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심장이 짜릿한 설렘과 행복한 일상 따위는 잠깐이거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찾는 노력을 멈출 수 없습니다. 정확히 알 수도 없는 사랑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반증입니다. 수세기 동안 많은 작가들이 사랑에 관한 각자의 해답을 찾아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작가들마다 자신만의 사랑을 이루면서요. 김소연 시인의 글 또한 그렇습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자신이 만들고 이룬 자신만의 사랑이 생깁니다.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더욱 소중한 자신만의 사랑을요. 자신의 사랑을 사랑하는 사랑을 가질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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