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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Oct 26. 2023

아침이다.

아침소묘

 




 잠이 오지 않아 집 청소를 했다. 필요한 부분만 찾아 읽고 바닥에 펼쳐놓았던 철학책을 어 책장에 꽂고, 시도 때도 없이 펼쳤던 김수영 시집도 꽂아놓았다. 분명 다시 꺼낼 책이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정리정돈. 짧더라도 그 순간이 필요했다. 널브러진 종이와 비닐봉지를 한쪽에 쌓아둔 재활용 쓰레기와 함께 분류했다. 버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푸근했다. 경계가 흐려진 세계는 뭔가 알 수 없는 아늑함이 있다.


 며칠 전만 해도 그 아늑함이 걸쭉한 전분처럼 갑갑했다. 앞과 뒤가 사라진 느낌이거나 영원히 중간에만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을 닮은. 지난밤에 쓴 글을 모두 지워버렸다. 구분이 흐리다는 것은 구분하고자 하는 사람, 또는 구분받고 싶은 사람에게 감옥이다. 공포다. 하지만 누가 이 감옥에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참으로 무한하다.

 괜히 호흡이 가빠진다. 질질 끄는 슬리퍼 소리가 골목에 가득 찬다. 골목이 확성기처럼 소리를 확장하여 더 멀리 보내는 느낌이고, 그 확장된 소리는 다시 나에게 더 크고 둔중하게 돌아올 것만 같다.

 화장실 청소를 했다. 변기가 깨끗해졌다. 화장실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 벽에 클림트의 풍경화를 붙였다. 선이 없어진 그림이다. 뭉개진, 그래서 몽환적인 풍경이 빽빽하게 가득 차 있는 그림. 선이 사라지고 덩어리로 가득 고여 있는 그림이다.

 그렇구나. 고였다가 맞는 것 같다. 나는 어제와 내일에 고여 있다. 고여있기에 구분이 없다.

 어떻게 하지? 더 깊게 침잠해야 하는지, 아니면 괜찮은 척 웃어야 하는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열심히 청소를 하면 잠이 올 줄 알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옷을 입고 나왔다.

 천천히 걸었다. 새벽부터 일터인 서점에 가서 할 일은 없다. 그냥 따뜻한 커피 한잔이 마시고 싶다. 내 앞을 재빠르게 지나치다 멈춘 황색 고양이와 어중간하게 인사를 했고, 길가를 쓸고 있는 형광 옷을 입은 청소부 아저씨에게는 속으로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더 천천히 걸었다. 경계가 희미해진, 그러니까 빨리 출근을 해야 한다는 목적이 사라진 이 공간, 이 시간에 나는 처음으로 거리를 느꼈다. 낯설고 생소하게, 보이지 않던 여전히 푸른 철쭉이과 길 건너편 빨간 우체통이 보였다. 아직도 우체통이 있다니! 전봇대에서부터 길 안쪽으로 길게 이어진 물길, 누군가의 노상 방뇨의 흔적도 보였다.

 잠깐, 집 청소를 자주 못 한 이유를 생각했다. 생각보다 삶에 지쳤다. 지치면 많은 것을 잃는다. 잊어버린다. 그것 중에 소중한 것도 있다. 지쳤다는 것을 열심히 산다로 착각했다. 항상 뒤늦게 깨닫는다.

 내가 접속하는 것은 결과였다. 결과에 접속했다는 말은 출발할 때부터 결과를 생각했고, 그 결과는 아무런 이유 없이, 또는 무책임하게 희망과 접속했다. 한마디로 지금 없는 상상과 접속했고, 그것을 꿈꿨고, 그래서 현재에 사는 나는 결핍을 느꼈다. 현재는 미래를 낙관하여 희망한 결과에 따른 가난일 뿐이었다. 이건 병이다. 감히 말하면 시대의 병이다.

 항상 내 시선은 미래에 가 있기 때문에, 현재는 부족한 무엇을 채우는 행위가 곧 자신을 성공한 인간으로 만들 거라는 착각! 그 착각을 죽을 때까지 한다. 그래서 죽음까지 먹어치우는 심각한 병이다.


 바람이 묽어진 먹물처럼 불어온다. 버스 정류장 의자에 잠깐 앉는다. 아직 새벽 첫차가 올 시간은 아니다. 모르는 사이에 살짝 한 꺼풀 벗겨진 것처럼 날이 밝아졌다. 하루의 시작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그냥 새벽이고 거리에 앉아있고, 먹빛 바람을 느끼고,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잃어버린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움은 없다.

 이번에는 황색 개가 바쁘게 도로를 건넌다. 다 건너고 길 건너편에서 나를 돌아본다. 나는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한다. 맞다. 나는 오늘 검은색 벙거지 모자를 쓰고 나왔다.

 “안녕.”

 개가 갑자기 질주한다. 오, 멋지다. 오직 개를 위해 이 거리가 존재하는 것 같다. 개가 하나의 점이 될 때까지 보다가 나도 따라 질주를 한다. 이상하게 저 감각을 따라 하고 싶어 벌떡 일어나 달린다. 따라 하니 힘이 난다. 뭔가 복받치는 감정을 느끼는 게 억울한데, 나의 달리기는 더 빨라진다.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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