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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Oct 28. 2023

당신의 취미를 응원합니다.

취미와 정체성



 막 서른이 넘었을 때의 일입니다. 고등학교 선배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책을 읽는다고 말했습니다. 질문한 선배는 다시 물었습니다.

 “취미 말고 무슨 일을 하느냐고?”

 선배는 장난치지 말라는 듯 웃으면서 말했지만 은근히 경시하는 태도였습니다. 이번에 건물을 샀다고 자랑하는 고등학교 선배는 어쩌다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고, 내 친구에게 고등학교 선배라고 처음 소개받은 상황이었습니다. 전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냥 선배 사람입니다.

 “책을 읽어요.”

 다시 대답했습니다.

 “직업 물어보는 거야?”

 “딱히 직업은 없는데요.”

 그때부터 그 선배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좋은 직업을 가진 내 친구와만 이야기했어요. 딱히 나를 무시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의 일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의문이었습니다. 잘 못 한 것이 없는데, 왜 나는 무시당하는 걸까?

 제가 그 선배의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지만 저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상처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 아무 이유 없이 주눅이 들거나, 무시당한다고 느끼며 화가 불쑥불쑥 치밀게 하는 형태로 가끔 튀어나왔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선배와 반대로 직업과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취미가 그 사람의 정체성과 더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이 그 사람의 욕망과 현재와 닮았다고요. 하지만 이런 생각과 상관없이 상대의 폭력적인 행위는 상처로 남더군요.


 그 선배는 저와 대면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이해하기 위해 저와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저의 외부 어딘가에 있는 기준과 대화를 하려고 했고, 기준에 부합한 모습이 없자 그 순간 없는 존재가 된 것이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분명 직업과 사회적 지위는 그 사람을 나타내는 일부분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 선배는 직업이 거의 전부였던 것이고, 저는 취미가 저의 정체성을 대부분 이룬다고 믿었고요.   

 그러면 취미가 뭘까요? 저의 정체성과 더 가까운 취미 말입니다.

 니체가 말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이 말의 뜻은 종교에서 믿는 신이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은 외부의 기준입니다. 우리를 구조화한 권력이고 기준입니다. 신이 죽었으니 우리를 만든 기준, 주인이 죽은 것입니다.  주인이 죽었으니 노예였던 인간은 이제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 않아요. 노예였던 습성이 남아있어 여전히 바깥에서 찾습니다. 신 대신에 자본, 또는 좋은 직업, 성공한 사업가가 신의 위치로 대체되기도 합니다.  

 주인이 죽었는데도 노예는 해방을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없는 상태를 두려워 새로운 주인을 찾는 형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주인이 되는 하나의 방법이 취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노예의 취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잘 생각해보셔야 해요. 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치유하기 위해 취미를 갖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상관없습니다. 자본의 시스템 안에서 내일 더 활기차게 일을 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취미입니다. 그래서 자본은 사람들에게 취미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번 돈을 취미에 쓰는 건 좋은 거라고 광고를 하지요.

 그렇다고 돈을 버는 행위를 터부시하는 건 아닙니다. 당연히 돈을 벌어야 하고, 좋아하는 취미를 하기 위해서는 돈도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취미가 어디에서 왔냐는 것입니다. 그 계보가 중요한 것이지요. 내가 하는 ‘취미’, 이 단어를 붙인 그 행위가 어디에서 왔는지 말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돈만 벌면서 살 수는 없잖아? 취미를 가져봐.”

 당신의 취미가 이런 대화에서 나왔다면, 당신의 취미는 돈만 벌고 살 수 없으니 가지게 된, 돈을 버는 행위를 더 잘하기 위한, 또는 돈을 버는 데 필요한 정신적인 여유를 가지기 위한 취미입니다. 이때 취미의 계보를 따져 거슬러 올라가면 일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취미가 일을 하고 남은 시간에 하는 하위의 또 다른 일이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돈을 버는 행위를 더 잘하고, 어쩌면 먹고살기 위해 온종일 돈을 버는 힘겨운 행위를 버티는 위안이 취미가 되어도 상관없지 않냐고. 맞아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부합니다. 이것은 저의 기준입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제 욕망과 닮은, 제가 스스로 세운 기준입니다.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겠지만, 선배의 냉대에서 받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그 당시 직업을 가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을 한심하게 보는 시선과 대면하기 위해 만든 제 기준입니다.

 그때 저는 매일 ‘아모르 파티’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둡고 주눅이 들어있었지만,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이 지금보다 더 넘칠 때였습니다. 아모르 파티는 ‘내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입니다. 운명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신, 정체성이 될 수도 있겠죠. 저는 이렇게 바꾸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취미를 사랑하라.”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그 취미는 너의 운명이니 절대로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아라. 취미의 주인은 너여야 한다.”  



 당신을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저는 의사입니다, 저는 변호사입니다, 저는 카페 사장입니다, 이런 대답이 아닌 저는 책을 읽습니다, 저는 바느질을 좋아합니다, 저는 사진을 찍어요, 로 대답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대답이 용인되고, 이 대답을 하는 자신이 기쁘고 자랑스러웠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취미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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