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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Oct 24. 2023

문학적 시간

글 쓰는 파수꾼

 


 창가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햇살이 사선으로 얼굴에 비친다. 오른쪽 뺨이 따뜻하다. 햇살이 밝고 은은할수록 이상하게 허무할 때가 있다. 오묘하고 나른한 따뜻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가장 평화로운 상태를 상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오해와 어려움이 사라진 완벽한 상태. 하지만 곧바로 온갖 문제점이 뒤범벅이 된 현실을 대면하게 된다.

 내 삶은 왜 이렇지?

 이 불일치가 결국 허무를 만들어 내고 삶에 대한 의문을 만들어 낸다. 황현산 선생님은 이런 불일치와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문학적 시간이라고 말했다. 참 멋진 말이다.

 문학적 시간!

 불일치를 일치로 바꾸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적 시간은 차이 그 차체를 드러내는 시간이다. 모순 그대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적 시간은 힘든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생각보다 차이와 모순을 두려워해 일치시키고 제거하려고 한다.



 각자 자기만의 허무 극복법이 있을 것이다. 음악을 듣는다든지, 영화를 본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 아니면 인터넷 게임을 한다든지,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또는 짧은 숏츠를 본다든지. 요즘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너무 많다. 그래서 오히려 문제다. 극복법이라기보다, 잊는 법으로 발전했다. 잊었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다시 대면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잊는다.  

 하지만 대면할 수밖에 없고, 그 순간 삶의 성숙도가 나타난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발전시킨 성숙한 방법을 찾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존경한다.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쓰다 보면 말이 되게 만들어야 하고, 이리저리 글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논리가 생긴다. 대부분 생뚱맞은 개똥철학이지만, 나름대로 모순에 새로운 형식을 부여한다.

 작가들마다 모순을 대하는 자신만의 형식이 있고, 그건 작가의 문학성이 된다. 우리는 그런 작가의 글을 읽고 새로운 관점에 감탄하고 받아들이고, 때로는 의문을 표한다. 이런 상호관계를 통해서 독자도 자신만의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불확실한 뭔가를 형식에 담으면 견고해진다. 햇빛에 아른거리는 허무를 형식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시간이 곧 문학적 시간인 것이다. 형식에 담긴 허무는 단단하다.

 단단한 허무를 추구하는 사람은, 허무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고 허무 위에 삶을 다시 꾸린다. 허무 위에 꾸려진 삶을 사는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읽은 많은 소설 속 주인공도 그랬다.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도 그렇다.  


 "너 ‘호밀밭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면’이라는 노래 알지? 내가 되고 싶은 건…"

 "그 노래는‘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이야" 피비가 말했다.

 "그건 시야. 로버트 번스의 시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피비가 옳았다.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이 맞다.

 사실 난 그 시를 잘 모르고 있었다

 "내가 ‘잡는다면’으로 잘못 알고 있었나 봐" 나는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 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 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29쪽)


 기성세대의 허위에 진저리 쳤던 17살 홀든은 후에 어떤 삶을 꾸렸을까? 아니든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궁금하다. 나와 비슷한 자영업자가 됐을까? 아니면 그냥 직장인? 유명한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고, 사업을 해서 성공해 사장이 됐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사람. 바로 내 옆집에 사는 사람 같은, 나와 비슷한 소시민이 됐을지도 모른다. 왠지, 나는 내 옆집에 사는 누군가가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집 밖으로 나가면 햇볕에 가만히 앉아 있는 아저씨가 있다. 책을 들고 나와 읽기도 하고, 화분에 물을 주기고 하고, 깍두기에 막걸리를 마시기도 한다. 지나가면 친근하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홀든은 외국 사람이니, 이런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 나이 든 홀든은 이런 이미지다. 햇볕 속에 가만히 앉아 있지만 단단해 보이는 사람.


 홀든은 진정한 파수꾼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붙잡는 사람으로 말이다. 무너진 삶을 처음부터 구축한 그의 경험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무너진 기록이면서 새로 구축하는 기록이다. 왜 무너졌는지 아는 것이 바로 구축하는 행위다.

 내 글이 그랬으면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모순을 대하는 지세이고 바로 붙잡는 행위다. 모순을 있는 그대로 붙잡기를 계속 반복하다 보면 자신만의 붙잡는 방식이 생길 것이고, 그 방식과 논리가 타당하다면 내 글을 읽는 사람 중 누군가를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샐린저가 글을 통해 많은 사람을 붙잡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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