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과 연결
서점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은 파랗다. 서점 카프카에는 아무도 없다. 걸을 때마다 들리는 나무 바닥 소리가 멈추니, 가까이 왔던 것들이 이상하게 멀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발자국 소리. 이건 항상 멀어진다는 느낌보다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드는 소리다. 맞는 말인 것 같다. 멀리서 이곳 서점 카프카에 온 사람들이 내는 소리. 이 책장에서 저 책장으로 옮겨 갈 때마다 나는 소리. 자신이 고를 책과 가까워지는 소리다.
가을 하늘은 죽은 친구가 좋아하는 색이다. 청명한 가을날에 학교 운동장에서 맥주를 마신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색이 좋다. 맥주보다 단데.
그때는 친구도 나도 세상은 다디단 어떤 것이었다. 지금도 달지만, 미래에는 더 달 거라는 기대가 가득한 표현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는 젊었다. 젊다는 이유 하나가 모든 것의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뻔하기에 더욱 완벽하고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정답. 하지만, 정답이기에 사소한 티끌만으로도 틀릴 수밖에 없다. 미래는 완벽하게 틀렸다. 미래는 시간이 가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가른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청춘은 그냥 청춘이지, 미래를 위한 재료나 행복한 미래로 가기 위한 힘찬 함성이 될 수 없었다. 반대로 오늘 하루를 살았다고 미래의 멀고 먼 죽음에서 하루 짧아진 것도 아니었다. 미래는 매번 똑같다. 한마디로 미래는 없다. 미래는 덤이고, 내일도 덤이다. 일 년 후도 덤이다. 없다가 주어진 소중한 무엇이다.
손님도 없고, 맥주나 한 잔 하고 싶어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왔다. 맥주를 땄다. 탄산이 빠지는 소리가 막혀있던 내부의 뭔가를 같이 뚫어주는 것 같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뚫어주지 못하지만, 아주 잠깐 생기발랄해진다. 알코올처럼 투명하게.
나는 욘 포세의 <저 사람은 알레스>을 펼쳤다. 그리고 곧 덮었다. 청명한, 아니 이 표현이 싫다. 파랗게 질린 듯한 하늘을 보면서 맥주를 홀짝이다가, 지난번 카프카 읽기 모임에서 읽은 카프카의 소설 <유형지에서>를 다시 읽었다. 손님이 오기 전에 후딱 다시 한번 읽고 싶었다. 그 친구가 가장 좋아한 작품이 <유형지에서>였다.
이 기계 기괴하고 기발하지 않아. 몸에 문자로 죄를 새기다니.
마치 자신의 몸에도 문자를 새길 것처럼 말했다. 문신? 아니, 그것과는 다르지. 이건 무의식에 새기는 거야. 친구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모르는 죄를 고백하다니. 그건 죄질의 유무에 따른 고백이 아니다. 몸에 죄를 세기는 강도의 차이에 따른 고백이다. 바늘이 더 강하고 깊게 반복적으로 몸에 새긴다면, 큰 잘못이 아니더라도 나는 눈물을 흘리며 더 간절하게 나의 죄를 고백할 것이다.
카프카 단편 <유형지에서>에는 지난 시대를 대표하는 정형적인 인물로 장교가 나온다. 과거 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은 나이가 들어 죽었거나 시대 변화에 따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끝까지 변하지 않고 고집 부리는 사람이 장교다. 그 사람은 과거 시대의 대표이기에 과거 시대와 차이가 없다. 즉, 그 사람은 그 시대가 이룬 정의 그 자체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지만, 장교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아니, 머물 수밖에 없다. 장교는 새로운 시대와 차이가 있다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새로운 시대는 그가 머문 시대의 정의와 배치되기 때문이다.
장교는 앞에서 읽은 <어느 삶의 음악>에 나오는 단어 '호모 소비에티쿠스'처럼 고정되었다. 단어가 의미가 있으려면 다른 단어와 확실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 단어의 뜻은 다른 단어와의 단절 속에서 이뤄진다. 단어의 뜻 이외의 것이 침범하면 가차 없이 모두 차단하고 잘라내야 한다. 장교는 그런 사람이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지만, 아니 이미 왔지만 장교는 과거에 머물고 침입하는 모든 것을 차단하고 단절한다.
'호모 소비에티쿠스'가 과거 시대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처럼 장교도 그러하다. 소설 마지막에 확실한 단절로 장교는 죽음 선택한다. 장교는 자신이 믿는 사상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삶을 완성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확실히 과거에 머물면서. 현재와 단절하면서. 하나의 단어로.
"정당하여라."
장교가 자신이 바늘로 글자를 세기는 기계 써레에 들어가기 전에 짜 맞춘 문자다. 하지만 기계는 고장이 나서 장교 몸에 '정당하여라'를 새기지 못한다. 그리고 죽는다.(죄인들은 자신의 몸에 죄가 새겨지고, 글자를 모르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죽게 된다.) 물론 장교는 자신이 짜 맞춘 것이기에 자신의 몸에 새겨질 글자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몸에 단어가 새겨져야 한다는 것이고, 그건 장교가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써레는 고장이 났다. 그건 과거 시대는 고장인 났다는 뜻이고, 이제는 제구실을 하지 못해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의 입술은 꽉 다물어져 있었고 눈은 떠 있었으며 살아 있는 기색이었다. 그 시선은 조용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204쪽)
죽은 장교의 모습이다. 장교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런데 왜? 과거는 고장이 났는데도 왜? 어쩌면 장교는 자신의 몸에 정당하려라,라는 글자를 세기고 싶었던 이유는 시대가 바뀌었어도 자신은 여전히 정당하기 때문이다. 현시대와 맞지 않지만 정당하게 살았다는 마지막 확신 아니었을까! 죄라면 자신이 정당했다는 것밖에 없다는 확신.
글은 고정이다. 단어는 다른 단어와의 차단을 통해서 뜻을 발현한다. 물론, 단어는 단어로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 사과라는 단어의 뜻을 찾으면 '사과나무의 열매'로 나온다. 사과의 뜻을 알려면 열매와 나무라는 뜻을 알아야 한다. 열매는 '식물이 수정한 후 씨방이 자라서 생기는 것'으로 나온다. 이제 씨방의 뜻을 알아야 한다. 씨방은 사전에 뭔가로 나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단어의 뜻을 알려면 연쇄적으로 또 다른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한다. 즉, 단어는 타 단어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렇게 단어는 다른 단어의 뜻에 빚지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홀로 설 수 없다. 그렇지만 단어는 또 다른 단어와 차이와 대립 관계, 또는 다른 단어와 확연히 구별되는 단절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확한 자신의 뜻으로 쓰일 수 있다.
언어는 거대한 공동체이면서, 또 홀로 서 있는 단어들의 집합이다. 관계와 단절이 물세 틈 없이 조직되어 있다. 단어의 존재 방식은 인간의 존재 방식과 닮았다. 언어는 시대마다 다르듯, 인간도 시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닭과 달걀처럼 어떤 것이 먼저인지는 알아내기 힘들다. 언어가 우리의 존재 방식을 결정짓는지, 아니면 우리의 존재방식이 언어를 탄생시키는지.
소쉬르의 언어학에 뿌리를 두는 구조주의는 언어를 행동하고 사고하고 느끼는 모든 것의 기저에 깔린 구조로 본다. 개인적인 의지나 관점이 아닌 언어의 구조에 의해 우리의 무의식이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글자가 죄수의 몸에 새겨지는 건 사회가 내리는 구조적 단죄일 수 있다. 몸에 새겨진 죄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글자는 완벽한 단정이고, 확정적인 기록이다.
글자를 모르는 죄수도 글자를 몸에 새기기 시작한 지 6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죄를 알게 된다. 무의식에 고통과 함께 새겨지는 것이다. 아무 잘못이 없는데, 사회가 잘못했다고 하면 잘못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의식에 글자를 새기듯, 그렇게 구조적으로 인간 내면에 구조를 심는다. 우리는 죄가 없는데도, 어떤 죄인지도 모르면서 매일 죄를 고백한다.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써레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고문은 12시간 동안 이뤄지고, 6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죄를 알게 된다. 12시간을 일생으로 잡는다면, 벌써 일생의 반절을 고문 받으며 지냈기에 우리는 항상 죄를 고백한다.
아,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지 않았습니다.
열정적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바보처럼 아까운 시간을 버렸습니다.
내 몸에는 이미 근대사회의 죄인 노력, 또는 열심히,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소설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장교가 모시던, 그러니까 죄인은 고문하고 죽게하는 써레를 사용하게 한 전임 사령관의 비석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사령관이 일정 햇수의 기간이 경과한 후에는 부활하여 이 집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지휘하여 유형지를 재정복라리라는 예언이 있도다. 믿고 기다릴지어다!'라고 쓰여 있다.
전임사령관은 다시 돌아왔다. 써레의 처형 같은 유대인 학살이 있었다. 그리고 몸에 언어를 새기듯 우리에게 자본주의를 새긴 사회가 도래했다. 평화의 시대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몸에 단어를 새기고, 스스로 처형한다. 마치 장교처럼. 모두 자기 착취를 한다. 써레라는 고문 기계는 이제 인간 내부에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일터인 서점 카프카도 유형지이다. 나는 서점 카프카라는 유형지에서 내 몸에 성실한 자영업자라는 글자를 새긴 죄인이기도 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몸에 새겨진 글자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좋아하는 일, 이 단어 자체가 근대가 만든 거대한 구조가 만들어낸 단어 조합이다.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축복이다,라는 환상 속에서 허우적 거린다.
하지만 어떻게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사회가 그렇게 구조화되었고, 그 구조에서 튕겨나가는 것은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 사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고 보니, 구조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장교처럼 철저히 자신을 속이지 않는 한 구조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변한다. 확실한 구분을 통해 단어가 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타 단어의 도움 없이는 단어로 홀로 설 수 없다. 단절과 연결. 그 과정의 반복이 거대한 언어 구조를 만들고,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지고 과거의 단어가 사라진다. 아주 촘촘한 그물이라도 그 사이의 틈이 있고, 그 틈에서 꾸물꾸물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새어 나온다.
오, 삶의 집요함! 구속과 탈출. 단절과 연결. 짧은 순간 수없이 반복되는 이 과정 자체가 삶이고, 집요함이고, 새로움이다. 맞다. 반복이다. 단절과 연결의 반복이다. 동일성과 차이의 반복이다. 반복은 똑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똑같은 것을 만들 수 없음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반복은 결국 차이를 생성한다. 똑같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똑같은 과정을 반복을 하고, 그 과정에서 이상 상품이 만들어진다. 그 이상 상품을 폐기처분한다고 해도 차이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지울 수 없다. 차이는 생성의 근본 중에 하나다.
어느새 맥주를 다 마셨다. 너무도 사소하지만, 일하다가 맥주를 마시는 것도 하나의 차이다. 손님이 없는데도 즐거운 이유가 알코올의 기운일 수도 있고, 새롭게 발견한 차이의 힘일 수도 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서점 카프카가 유형지이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지만 그 반복 안에는 차이가 분명 존재하고, 그 차이는 아주 작더라도 생성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조건이다. 서점 카프카가 유형지가 아닌 탈주의 공간이기를 바란다면 반복이 만들어내는 차이에 집중해야 한다. 갇혀있지만 분명 열려있으려는 몸부림. 몸에 새겨진 단어에서 탈출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다른 단어의 힘을 빌려야 한다. <유형지에서>를 덮고 욘 포세의 소설 <저 사람은 알레스>을 다시 펼친다. 누군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온다.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새로움은 그렇게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