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물 Nov 12. 2024

차이를 찾아서

어느 삶의 음악

 1년 동안, 내가 한 일은 책을 팔고, 가끔 책을 읽고, 가끔 글을 썼다. 부정하고 싶지만, 가장 뼈아픈 단어는 '가끔'이다. 정말 가끔 마음이 내키면 읽고 썼고,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았다. 뭔가 자유로운 느낌이지만, 실상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어떤 근본적인 두려움이 나를 꽉 메우고 있었다.

 가끔 내키면 글을 쓰는 사람을 글쟁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명확한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나는 나를 배반하고 싶은 욕심에 치를 떠는 것이다. 맞다. 욕심이다. 노력하지 않고 얻으려는.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이제 막 가을인데, 갑자기 새벽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두꺼운 이불만으로는 안 되는 날씨여서 온수매트를 켰다. 곧 이불속은 후끈 달아올랐는데, 뜨거움 속에서 나는 추운 듯이 끙끙 알았다. 나는 침대 맡에 둔 cd플레이어에 피아노 소타나 모음집을 넣고 아주 작은 소리로 틀었다. 그리고 책을 펼쳤다.  



 안드레이 마킨이 쓴 <어느 삶의 음악>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눈보라에 휩싸인 우랄 지방의 기차역에서 화자는 '호모 소비에티쿠스'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주위를 경멸하듯 쳐다본다. 호모 소비에티구스는 스탈린 체제에 복종하고 충성하는 인간, 즉 정치 체제로 개조된 인간 종을 뜻한다. 부조리한 정치 상황에 인내하고 복종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 화자는 이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리에서 떨어져 마치 혼자 부조리한 삶을 통찰한 듯한 시선을 던진다. 그러다 음악 소리에 이끌려 어두운 공간에 들어가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을 본다. 두 사람은 다시 기차의 객실에서 마주친다. 노인은 화자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노인은 '알렉세이 베르그'이고, 피아니스트다.

 소설은 알렉세이 베르그의 삶으로 넘어간다. 독자는 화자와 함께 알렉세이 베르그의 삶을 듣는다. 그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재능 있던 스물한 살의 피아니스트가 왜 도망치며 살았는지, 왜 수용소에 끌려갔는지.


 가혹한 숙청이 있던 시절 피아니스트는 가족이 수용소로 끌려가자 홀로 시골 친척집으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죽은 군인의 신분을 훔쳐 전장에 나가고 장군의 운전기사가 된다. 그렇게 신분을 속이며 산다. 그러다 장군의 파티에서 피아노 앞에 앉게 되고, 그는 자신의 가짜 신분이 드러날 것을 알면서도 피아노를 친다. 그리고 수용소로 끌려가 10년 동안 갇혀 지낸다.

 피아니스트는 거대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짓눌려 살았다. 가짜 신분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아무리 거대한 국가의 시스템이 억압하더라고, 그 억압과 맞닿아 있는 한 사람의 인생은 지워질 수 없다. 아니, 지워졌어도 그 삶은 완벽하게 다시 재현된다.

 막강한 정치 체제의 힘에 짓눌려 있는 삶은 비슷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르다. 옆 집 아저씨, 친구 아버지, 사촌 여동생. 그렇게 너무 평범한 삶이기에 잊히고 지워졌던, 그렇지만 누구와도 똑같을 수 없는 처절한 삶이 다시 기록된다. 그것이 문학의 의무다. 지워지고 없어진 삶을 복원하는 것. 누구나 기억하는 영웅이 아닌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흔하지만 거친 파도에 깎여 단단하고 매끄럽고 아름다운 하나의 인생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

 그 시기에 알렉세이 베르그와 비슷한 삶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차이는 너무 작기에 화자가 말한 '호모 소비에티쿠스'적인 삶, 이 단어 하나로 가차 없이 폭력적으로 모두 묶어 버릴 수 있었다.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단어 속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통적인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 버리고 혹여 튀어나온 차이가 있다면 가차 없이 제거한다. 화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경멸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각자 삶을 깊이 살피기보다 하나로 카테고리로 묶고 개념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화자가 알렉세이 베르그의 삶을 듣는 순간 삶을 재단하던 개념은 찢어지고 그 사이로 차이가 드러난다. 작은 차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집약한 것이고, 그 차이는 작지만 우주만큼 넓다.

  

 차이. 그냥 다른 것? 이렇게만 본다면 굳이 사유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어떻게 차이를 제거해 왔는지 알 필요가 있다. 즉, 차이의 제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잊었는지를. 그리고 문학은 왜 끝없이 사라진 차이를 찾아 떠나는지.

 '호모 소비에티쿠스' 적인 삶 속에 분명 알렉세이 베르그도 포함된다. 하지만 알렉세이 베르그의 구체적인 삶을 들은 화자는 이제 알렉세이 베르그에게 '호모 소비에티쿠스'라고 경멸적인 시선을 보낼 수 없다. 분명 그는 호모 소비에티쿠스지만 호모 소비에티쿠스는 그에게 맞지 않는 단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묻는 것이다. 호모 소비에티쿠스 단어의 뜻대로  피아니스트를 스탈린 체제에 복종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지 않은 사람으로 부를 수 있을까? 무력한 사람. 또는 노예적인 사람으로.

 아마 그 사람을 축약하듯 요약한 삶을 들었다면 화자처럼 똑같이 비난했을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단어 지식, 호모 소비에티쿠스가 갖는 위력이다. 단순한 지식, 그 안에 구겨진 언어. 천천히 사유하고 이해하는 언어를 잃어버린 단순한 단어의 뜻으로만 재단하여 쓰였기 때문이다.

 세상을 복잡함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끝없이 차이를 발견하는 사람은 정체된 지식에 반기를 든다. 그것이 비판이다. 하지만 비난은 이미 만들어진 지식의 틀을 가지고 드러난 차이를 가차 없이 제거하는 데 쓴다. 오히려 이런 단순한 지식은 이미 만들어진 지배 권력에 따라, 또는 지배 권력의 지속을 위해 튀어나오는 차이를 자르고 복속시킨다.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니?

 와, 저 삶을 봐. 왜 이렇게 멍청해? 저항할 노력도 하지 않잖아.

 하지만 화자는 알렉세이 베르그의 삶을 듣는 순간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폭력적인 잣대로 그를 비난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함부로 가둘 수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을 조잡하고 초라한 한 단어에 구겨 박았는지를 말이다.


  지식은 사람들의 합의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단어 또한 그렇다. 그 지식은 차이를 제거한 것들이다. 차이를 모두 함축한다면 그건 지식이 될 수 없다. 물론, 그 지식 중에는 오히려 복잡하고 다층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지식도 있지만, 반대로 세상을 쉬게 이해하기 위해서 잘라내고 가둬 기성품처럼 포장한 지식도 있다.  

 그런 지식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기에 이해라는 말을 붙일 수 없기도 하다. 그냥 아는 것이다. 조금만 노려하면 모든 사람이 알기에 평범하다. 그래서 대중적이고, 특별할 수 없고, 다를 수 없다. 평범한 것이 달라지는 순간 사람들은 이해하기를 포기하거나 거들떠보지 않는다. 어려운 것은 돈이 되지 않고, 돈이 되지 않는 건 자본사회에서 외면받는다. 언어에도 효율의 시대가 왔고, 효율적이려면 단순해야 한다. 그렇게 효율적으로 세상을 구분한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단어로 가둘 수 없다.

 거짓 삶을 살던 알렉세이 베르그는 건반 위에 손이 올려지는 순간 과거의 삶과 함께 폭발한다.


 '그는 연주를 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밤을 가로질러 전진했다. 얼음과 나뭇잎과 바람의 무수한 단면들로 이루어진, 이 밤의 투명하고 불완정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안에 불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도 후회도 없었다. 그가 헤치고 나아가는 이 밤은 불행과 공포와 만회할 수 없이 산산조각 나 버린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 모두가 이미 음악이 되어 오로지 그 아름다움으로 존재했다.'(119쪽)


 연주하는 순간 거짓 신분이 들통난다. 그래도 그는 피아노 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순진한 저항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순간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산산조각 난 과거의 자신을 다시 찾는 게 아니다. 그는 '헤치고 나아가는 밤'이고, '모두가 이미 음악이 되어 오로지 그 아름다움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의문이 생긴다.

 호모 소비에티무스로 세상을 경멸하는 화자와 세상의 거대한 억압에 짓눌려 살다가 마지막에 피아노를 친 피아니스트 중에 과연 누가 더 거대한 구조에 일조하고 있는가?  그가 피아노 치는 장면은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정의에 맞지 않다. 복종하고 인내하고 노예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닌 아름다움을 창조한 순간이다.

 단순 비교를 해보면, 화자와 호모 소비에티쿠스인 피아니스트. 둘 중에 누가 더 기존 질서에 차이를 만들어내고 틈을 만들어냈는가? 기존 질서가 만들어낸 단순한 지식,  차이를 모두 잘라내어 잘 포장해 쉽게 이해하고 쉽게 뱉어낼 수 있으며, 그렇게 자신을 비판적인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도와주는 지식을 툭 뱉어내는 사람과 거대하고 폭력적인 구조에 짓눌러 있다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단 한 번, 자신을 둘러싼 구조의 폭력과 부조리에 저항하며 피아노를 연주한  피아니스트.

 이 둘 중에 누가 더 호모 소비에티쿠스일까?

 이 질문은 화자가 더 호모 소비에티쿠스가 아닐까,라는  질문이 아니다. 화자도 호모 소비에쿠스라는 단어에 가두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화자가 다른 사람을 호모 소비에티쿠스에 가두면 안 된다. 가두는 사람이 곧 갇히게 되는 것이 기존 사회가 만들어낸 덫이다. 자신이 자유를 원한다면 먼저 타인을 가두면 안 된다.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소설은 끝장면에 도달하는 순간, 내가 호모 소비에티쿠스 같은 단어를 난발하던 사람임을 깨닫게 한다. 차이를 가두고 잘라내고 버렸던 사람, 그리고 그건 피아니스트를 수용소로 보냈던 사람들이 쓰던 언어를 나도 썼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그래서 차이가 가득한 한 사람의 인생이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대한 권력은 쉽게 그렇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피아니스트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피아노 앞에 앉기 위해 그는 많은 시간 숨어 살았고, 10년 동안 수용소에 갇혀 지냈다.

 나는 달라질 거야. 이런 구호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깊고 집요하게 아주 작은 차이를 찾아 떠나야 한다. 누가 연주했지도 모를 피아노 소나타는 계속 흘러나온다. 나는 여전히 구분하지 못한다. 다만, 베토벤, 쇼팽, 라흐마니노프의 똑같은 악보를 가지고 연주자에 따라 작은 차이가 만들어지고, 그 차이가 위대한 음악이 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연주자가 평생 찾아 헤맨 차이라는 것을.   

 나는 눈치채고 있다. 결국 아름다운 차이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그래왔지만 계속 도전해 왔다는 것을. 그래서 찾는 행위 자체가 전부일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똑같을 때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똑같다는 안정감에 숨어서 비겁해진다. 결코 아름답지 않다.

 결국 마지막장까지 소설을 다 읽었다. 책을 덮었다. 나도 이제 차이를 찾아 떠나야 한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 나의 차이를 찾아 떠나는 방법은 타인의 차이를 자르고 가두지 않는 것이다. 차이는 나와 당신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당신을 매끄럽게 잘라 가두면, 당신과 접속한 내 차이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내 안의 차이를 찾아 떠나는 일은 차이가 가득한 당신을 찾아 떠나는 일이기도 하다.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이 차갑고 창백하다.




 

화요일 연재
이전 01화 두 번째 겨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