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소중한 차이
1.
산책의 계절이 왔다. 빠르게 걸으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가도 천천히 걸으면 시원하게 마른다. 걷다가 멈춰 둘러보면 뭔가 한 톤 낮은 색감이 사방에 가득하다. 회색톤 아파트 건물마저도 연한 황금빛처럼 보인다.
어젯밤에는 두꺼운 이불을 꺼내 덮었다. 솜이 들어간 푹신한 이불속에 있으니 몸이 말랑말랑 해지는 느낌이었다. 읽던 책을 언제 떨어트렸는지도 모르게 깜박 잠들었다가 몸이 으슬으슬 추워 깼다. 이불은 침대 끝에 간신히 걸쳐 있었다. 더웠나 보다. 걷어찬 이불을 다시 끌어다 덮고 발만 밖으로 내밀고 꼼지락거렸다. 잠결에 다시 발을 쑥 집어넣겠지만, 지금은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찬 기운이 짜릿하고 좋아 더 열심히 꼼지락거렸다.
아침저녁으로 변덕이 심한 가을이기에 나도 덩달아 변덕이 심해진다. 감히 말하면 날씨가 나를 만든다. 조금 넓게 말하면 계절이 나를 만든다. 내 경험이 나를 만든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위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미약하고 취약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내 경험은 날씨에 따라 달라지고, 자연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의 경험일 뿐이다. 자연에 도전하고 극복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건 자연이 허락한 도전일 뿐이다. 펄펄 끓는 용암도 자연이고, 한 도시를 사라지게 한 태풍과 대륙을 나눈 지진도 자연이다.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한없이 무력하다. 경험 따위를 논할 수 없다.
뭐, 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계절이 나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그리고 마침내 겨울이 올 때까지 나의 삶은 그 안에서 꼼지락꼼지락 변한다. 곧 두 번째 겨울이 온다.
사실 날씨는 변덕이 심하지 않다.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생은 짧기에, 짧게 볼 뿐이고, 그 짧은 식견으로 자연에 자신을 대입한다. 그래서 가을이 변덕스러워진 것이고, 그건 내가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즉, 변덕은 가을을 보내는 내 안의 단어다. 그래서 내 안에서 이 단어가 튀어나올 때는 선반 끝에 놓인 도자기처럼 내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깨닫는다. 그리고 얼마나 약한지도. 이런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가을은 아름다운 질병 같은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에는, 나는 나를 자주 싫어한다.
아니, 나는 나를 너무도 사랑한다. 그래서 싫은 것이다. 대부분 나는 중간 어디쯤에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가끔 내가 싫어질 때면 사악한 마술처럼 중간이 통째로 사라진다.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가,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다. 물론, 상대에게 내 감정을 터트릴 정도로 못난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나름 중화한 감정이 변덕이다. 변덕을 부리다 보면 나는 다시 중간 지대로 스르륵 옮겨간다. 마치 가을이 겨울이 되는 것처럼.
변덕은 여러 방면으로 일어난다. 읽던 책을 던져버린다든지, 맛있던 커피가 갑자기 싫어진다든지. 때로는 전에 먹지 않던 음식을 먹방 하듯 먹는다든지. 하루종일 침대에서 꿈쩍하지 않을 때도 있다. 변덕은 내가 나에게 부리는 짜증이다. 그래서 누구도 내가 변덕을 부리는지 모른다.
나는 이 시기를 무난히 넘기기 위해 글을 쓰고, 그 행위가 나에게 힘이 된다. 사실, 변덕을 변태로 바꿔 불러도 좋다. 변덕이 심해지면, 변태적으로 글을 쓴다. 글쓰기는 내가 터득한 유일한 신경안정제다. 변덕 부리는 내 감정을 글로 나사처럼 고정하면 날뛰던 감정이 진정된다. 그리고 고정된 글을 읽으며 흐뭇함을 느낀다. 그래, 잘 잡았어. 환호성을 지을 때도 있다.
나는 인간의 가장 변태적인 행동으로 낚시를 꼽는다. 누군가는 낚시를 자신을 돌아보는 고요의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완전히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평온과 고요를 위해서 타 생명을 낚는 행위. 먹기 위해서라면 나는 동의한다. 그건 모든 생명체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자연법칙이니까. 하지만 고요를 찾아온 낚시꾼은 물고기 입 천정을 날카로운 낚시 바늘로 뚫어놓고 몸부림치는 생명력을 느끼면서 '손맛'이란 표현을 쓴다. 그리고 방생한다. 잘 살아. 이런 말까지 하면서. 뭔가 엽기적이다. 타 생명체에서 느낀 싱그러운 생명력이 어째서 자신의 고요가 되는 것일까?
나는 나를 낚는 것이기에 비슷하지만 다르다. 낚시처럼 가장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방식으로 나를 낚는다. 글로 내 입천장을 뚫는 것이고, 그렇게 손에 전해지는 손맛을 느끼는 것이다.
가을이고, 요즘 나는 변덕이 심하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뭐가 걸릴까? 손바닥을 비비고 깍지를 끼고 손가락 마디 관절을 푼다. 내면에 날카로운 낚싯바늘을 던진다. 팔딱이는 손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두 번째 겨울이 다가온다.
2.
우리는 근대를 인간 주체의 탄생 시기라고 말한다. 탄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가진 인간 종이 튀어나왔고, 대다수의 인간에게 거의 동시에 침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빠르거나 늦고의 차이가 있지만, 공동체 전체에 역병처럼 퍼져 거대한 덩어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덩어리를 시대라고 부른다. 그런 근대 시대에 살았고, 여전히 그 시대 영향 아래 있다.
그러면 이미 탄생한 주체는 어떻게 자랐을까?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랐다면, 이제 어른이 되었고, 나름 성숙한 삶을 살고 있을까? 사실 질문이 아니다. 질타이면서 탄식이다. 인간 주체는 탄생한 적이 없다. 없는데, 있다고 착각했고, 그 착각은 거대한 시대를 만들었고, 그 시대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물론, 착각 따위가 없는 확실한 사실만이 올바른 시대를 만드는 건 아니다. 확실한 사실이란 단어 자체가 주체의 탄생처럼 증명하기 힘든 환상인데, 어떻게 그 위에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깨어나는 과정의 반복이고, 그중에 새로운 사실, 또는 올바르다고 믿는 진실을 발굴하고, 그것을 믿는 의지로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다시 환상이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주체의 탄생을 믿었던 우리는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갔고, 그 과정에 많은 것을 이룩했지만 반대로 많은 것을 파괴했다. 이제는 환상임을 알았고, 반성할 차례다.
아, 얼마나 쉽게 내뱉는 말인가! 반성!
그렇기에 우리는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하는 척하면서 다음 시대를 준비한다. 새로운 진실을 찾아 나설 것이고, 새롭게 찾은 진실로 과거를 덮을 뿐이다. 우리가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하지만 새롭게 뭔가를 찾는 행위는 중요하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 우리가 망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새로움을 찾는 행위 때문이다. 새로움이 꼭 진보가 아니더라도,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그것은 새로운 산업구조나 경제 이론이 될 수도 있고, 독특한 예술이 될 수도 있다. 국가 간, 또는 개인 간의 새로운 연대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 됐든, 인간은 새로운 것을 찾는 행위를 멈출 수 없다.
나는 항상 이것이 이상하다.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흔히 말해 태평성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그대로 유지하면 될 일을 우리는 기어코 그 상태를 부수고 치료하고 다시 부순다. 그러다 현재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간다.
맞다. 멈출 수 없다. 진작 인정했다. 인간은 완벽하면 깨트려 부수더라도 새로움 찾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완벽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부수고 새롭게 찾는 행위 자체인 것 같다. 그러면 당신은 새로움을 찾는 인간들 중에 어디에 속해 있나? 물론 뒤처져서 사라지는 존재도 많다. 대부분 기록되거나,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사라진 과거의 반복이 쌓이고 쌓여서 그 발판 위에서 새로움이 싹튼다는 것이다. 사라지고 지워진 반복을 통해서만 새로움을 찾는 행위가 더 강화된다. 역설적이게도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기억되기 위해 우리는 똑같은 반복을 하며 사라진다.
다시 똑같은 질문에 도달한다. 당신은 어디에 속해있나?
새로움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는 큰 덩어리 역사로 오기에 개인은 그 안의 작은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에 사라지더라도 내가 어떤 반복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은 새로움을 찾는 종이라면, 그 새로움을 찾게 하는 의지를 싹트게 하는 건 지루한 반복이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새로움을 찾는가, 라는 질문보다 이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당신은 어떤 반복을 하고 있는가? 어떤 무료한 짓을 계속하고 있는가?
다시 일 년이 지났다. 나는 일 년 전과 똑같은 짓을 반복하려고 한다. 완벽하게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이야 말로 환상이기에 차이는 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기에 반복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아주 작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새로움을 만든다.
별로 큰 변화는 아닌데? 맞다. 큰 변화는 이 작은 차이가 차곡차곡 모여서 계단처럼 층을 만들었을 때 이뤄진다. 누가 한 사람이 새로움을 만들었다면, 여러 사람들의 반복이 만들어낸 그 계단을 밟고 올라가 외친 것에 불과한다. 그러니 이미 있다. 이미 이 시대에는 새로움이 있다. 누구나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뿐이고, 알아차렸다고 해도 용기가 없어 외치지 못할 뿐이다.
가끔 그런 것을 눈치채고 언어로 쓰거나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고독한 철학자의 외침으로, 새로운 예술관으로 표출된다. 마찬가지로 경제 이론이나 과학으로 실현되기도 한다.
이미 있기 위해서는 작은 차이가 모여서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이미 있는 것을 찾아내 표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건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그저 발견일 뿐이다. 우리는 그런 발견을 해낸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 사람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새로움 시대의 주역이 된다.
물론 나는 그런 주역은 못 되지만, 새로운 역사적 발견 안에도 나의 지분이 있다. 그들이 밟고 올라간 계단은 내가 만들어낸 무료한 반복과 작은 차이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분명 과거 시대에도 지분이 있고, 새로운 시대에도 지분이 있다.
아주 작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나의 지분이 삶의 방향을 만들어내는 의지이고, 나의 예술이고 문학이다. 대단한 발견을 하지 못하더라도 내 지분이 있다는 것! 아주 작은 차이를 끝없이 발견하는 행위! 그것이 탄생이다. 주체의 탄생도 그렇게 탄생했고, 그렇게 시들어 갔다. 새로운 시대도 그렇게 올 것이다.
두 번째 겨울은 바로 작은 차이를 발견하는 계절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발견은 새로운 탄생의 발판이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라지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