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똑똑이

by 봄에 핀 코스모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어릴 때는 주위 어른들에게 똑똑하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집에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는 내 등 뒤로 들려오는 어머니와 그 손님과의 대화는 으레 이런 식이었다.

“쟤가 그렇게 머리가 좋다면서요?”

“아유, 아니에요.”

그때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어른들의 화법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손님들의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곧이곧대로 믿었던 것 같다. 믿는 대로 이루어지리라고 했던 이가 누구였더라.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는 정말로 ‘머리가 좋은’ 학생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성적이 곧잘 나왔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성적은 줄곧 상위권이었다. 집에 찾아온 손님이 나를 두고 어머니에게 하는 이야기도 더 이상 의례적인 것만은 아닌 게 되었다. 내용은 변하지 않았지만, 뭐랄까 분위기나 성격은 사뭇 달라져있었다. 그때쯤에는 이미 어른들의 화법에 대해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변화를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아유, 아니에요 하며 손사래를 치던 어머니 역시 어느 때부터인가는 그저 호호호 하고 웃을 뿐 별다른 대응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염연히 사실이 그런 걸 ‘아니에요’ 하고 부정할 수는 없겠지. 험난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나는 오만하게도 그렇게 넘겨짚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오만함의 수위가 조금씩 조절을 받았지만, 전보다 몇 뼘 정도 낮아졌을 뿐 멀리서 보면 여전히 물이 가득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 댐이 무너지거나 극심한 가뭄이 들지 않는 한 끄떡없을 것 같았다.

제이를 만났을 때의 내 상태는 대충 이러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한 삼 년 정도 지났을 때였을까. 어느 날 산책을 하던 중에 제이가 갑자기 내게 ‘헛똑똑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가만 보면 당신은 참 헛똑똑이야.”

세상에, 헛똑똑이라니.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 오만함의 수위는 아주 잠시 출렁거렸을 뿐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 아직 나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지. 지금부터라도 아내의 생각을 바로잡아주면 된다. 내가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자신하고 있는 동안 제이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당신은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잘한 것 같고, 같이 대화해보면 눈치도 빠르고 이해력도 좋은 것 같은데, 정작 당신 인생에 대한 문제는 아주 기초적인 것도 못 풀어서 쩔쩔매잖아. 그러니 완전히 헛똑똑이지 뭐야.”

대꾸할 말이 한 마디도 없었다.

제이의 말에 의하면 나는 사흘이 멀다 하고 지금의 삶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투정을 부리는데 레퍼토리도 거의 바뀌지 않을뿐더러, 조금씩이라도 해답을 구해가고 있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당신은 이렇게 계속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는 나중에 후회할 게 분명하다,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보고 싶다, 이런 소리들을 늘어놓으며 오늘처럼 골목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지 않겠어? 그래서 내가, 당신 말이 맞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아봐라, 필요하면 경제적인 부분은 내가 더 책임을 질 테니 당분간 회사는 쉬어도 된다, 이렇게 격려해주면 당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아무리 그래도 남편이 되어서 어떻게 혼자 집에서 놀 수가 있냐,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거 아니겠냐… 늘 이런 패턴이잖아.

“생각이 너무 많으면 아무것도 못 해. 너무 똑똑해지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헛똑똑이가 되는 거야.”

한 마디 한 마디 이어질수록 댐이 조금씩 갈라지는가 싶더니 제이가 말을 마쳤을 때쯤에는 마침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오만함이 조용한 골목을 소리 없이 훑으며 흐르다가 근처 배수구를 통해 어디론가로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어쩐지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날 침실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제이가 했던 말을 하나하나 곱씹어보았다. 확실히 나는 헛똑똑이가 맞는 것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차라리 집에 찾아온 손님들이 ‘쟤가 그렇게 머리가 좋다면서요?’라고 칭찬할 때마다 어머니가 ‘아유, 아니에요. 완전히 헛똑똑인 걸요.’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로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이는 여느 때처럼 베개에 머리를 대자 마자 곧바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하긴, 천재지변이 일어나기 전에는 끄떡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댐을 하루 저녁에 무너뜨렸으니 피곤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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