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비 분수 대신 우리 동네 골목

by 봄에 핀 코스모스

2015년은 정말 바빴다. 회사 업무가 한꺼번에 몰려서 이걸 처리하고 나면 저게 쌓여있고 저걸 처리하고 나면 어느새 밤이 되곤 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줄곧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산책은커녕 집에 오면 얼른 씻고 자기 바빴다. 어떤 날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그냥 자기도 했다.

외국계 회사를 다니고 있던 제이는 다른 건 몰라도 퇴근 시간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보장받는 편이었다. 그래서 지하철 막차조차 못 탈 정도로 퇴근시간이 늦어질 수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바쁜 거 언제 끝나?”

두 달 정도 독방에 갇혀 있다가 이제 막 햇볕을 본 죄수 같은 얼굴로 집에 들어서는 나를 볼 때마다 제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곤 했다.

“11월쯤에는 끝날 거야.”

그때가 겨우 6월이었다. 가슴속이 휴지뭉치 같은 것들로 가득 차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우리가 그해 겨울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해뒀다는 것이었다. 그래. 눈 딱 감고 11월까지만 고생하자.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스페인 계단에 앉아 젤라토를 먹고 있을 테니. 자정이 넘은 시간에 택시에 앉아 텅 빈 종로 거리를 바라볼 때면 내 마음은 어느새 비행기를 타고 로마로 날아가고 있었다.


도저히 올 것 같지 않던 11월이 마침내 왔다. 그때쯤에는 회사 업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제 퇴근 후에 제이와 머리를 맞대고 여행 일정을 짜보는 여유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했던 것이다.

우리 부부는 며칠 동안 불안한 마음으로 뉴스를 예의 주시했다. 보도에 따르면 테러범들의 다음 목표물은 바티칸인 듯했다. 아무래도 이탈리아 여행 계획을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고 싶었을 뿐, 우리에게 최후의 심판이 내리는 건 원치 않았다.

“아무래도 취소해야겠지?”

제이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취소라기보다는 연기라고 해두자.”

이탈리아 여행만 생각하면서 코피를 흘러가며 한 해를 달려왔는데. 나 역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여행 계획을 취소하게 되면서 금전적인 손해도 발생했다. 항공권 취소에 따른 수수료만 해도 오십만 원 정도였고, 미리 예약한 호텔 세 곳 중 두 곳은 환불이 되지 않았는데 그게 대충 오십에서 육십만 원 정도였다. 모두 다 해서 백에서 백이십만 원은 되는 것 같았다. 이게 과연 불안감에 대한 정당한 대가일까? 그러지 않아도 씀씀이가 작은 나는 계산기를 두드려보다가 울상이 되었다. 제이는 빙긋 웃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아야지?”

며칠 후 뉴스를 보니 테러범들은 벨기에 근처에서 모두 붙잡힌 모양이었다. 바티칸은 평화로운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트레비 분수 근처 어딘가를 걷고 있었을 텐데 우리는 동네 골목을 걷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냥 갔어야 했는데 그지?”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며 제이를 내려다봤다.

“결과를 알고 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지.”

그거야 그렇지만. 게다가 백이십만 원이면 읽고 싶은 책을 백 권은 살 수 있었을 텐데. 아, 이런 식으로 환산해봐야 마음만 아프고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다. 그래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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