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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에 핀 코스모스 Nov 13. 2019

변기 수리

   어느 날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변기가 바닥에 붙어 있는 부분에서 물이 조금씩 새고 있었다. 며칠 후 우리 집을 방문한 수리공은 아마도 변기 아래쪽이 좀 깨져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제이에게 전해 들은 말이다. 수리비는 한 이십만 원 정도는 들 것이라고 했단다. 실제로는 이십일만 원이 들었다. 무슨 부품을 새로 갈았다고 하는데 그 부품 값이 만원이었다. 

   “그런데 있잖아, 그 변기가 글쎄, 아저씨가 으쌰 하고 힘을 주니까 바닥에서 뚝 떨어지는 거 있지.”

   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마치 잡초처럼 쉽게 뽑혀 나오는 변기를 지금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나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약하게 붙어있는 줄도 모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무렇지도 않게 그 위에 앉아있었다니. 난 도대체 무슨 근거로 변기가 절대 쓰러질 리 없다고 철썩 같이 믿었던 걸까.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변기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얌전하게 바닥에 붙어 있었다. 제이는 하루 이틀 정도는 변기를 쓰거나 시멘트를 발라둔 곳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시멘트를 발라둔 곳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눌러봤다. 거의 굳은 것 같았지만 완벽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조용히 혼자 말라가 기도 벅찰 텐데 시멘트는 머리 위에 무거운 변기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변기 위에 앉기라도 한다면 더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변기 쓰면 안 돼”

   제이는 손가락을 흔들며 일부러 엄한 표정을 꾸몄다. 

   

   마침내 다시 변기를 쓸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새 집에 이사라도 온 것처럼 기뻤다. 시험 삼아 엉덩이를 이리저리 비틀어봤지만 변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변기란 응당 이렇게 바닥에 굳건히 붙어 있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세상 일들이 겉보기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진부한 비유이긴 하지만, 평온해 보이는 오리도 사실 수면 아래에서는 엄청 바쁘게 다리를 놀리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아내도 마찬가지 아닐까. 겉보기에 제이는 걱정이라는 게 전혀 없는 사람 같다. 언제나 개나리처럼 노랗게 웃고 있고, 베개에 머리만 대면 별로 뒤척이지도 않고 곧장 잠들어버린다. 가끔씩 내가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며 짜증을 내면 다 잘 될 거라며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준다. 하지만 수면 아래 감춰진 제이의 마음은 어떨까. 어쩌면 화장실에 새로 바른 시멘트처럼 우리 두 사람의 삶을 짊어진 채 그게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묵묵히 버티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달려가 등을 쓸어달라며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화장실에 앉아 있다 보면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생각이나 오랫동안 풀지 못한 문제의 실마리 같은 게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화장실에선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라는 책도 있는 걸 보면 나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날 나는 오랫동안 변기 위에 앉아 아내에 대해 생각했다. 앞으로는 이 변기를 볼 때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내의 마음에 드리운 그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변기와 아내에 대한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그때 밖에서 갑자기 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언제 나와?”

   아차. 어느새 나는 또 아내의 마음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방심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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