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고개 하나만 넘으면 S여대가 나온다. 여대 앞이라 그런지 골목마다 작고 귀여운 음식점들이 많이 모여 있다. 가끔씩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을 때면 제이와 나는 S여대 앞으로 간다. 보통 초밥집에서 초밥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시거나 동태찌개 집에서 찌개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대학생 때도 S여대 앞에 자주 놀러 갔었다. 그때는 늘 술만 마셨기 때문에 음식점이 이렇게 많은 곳인지는 몰랐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리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군데군데 비디오방도 참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한번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다가와서 함께 비디오방에 가지 않겠냐는 대범한 제안을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란 일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해주면 제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제이 역시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S여대 앞에 종종 놀러 왔다고 한다. 제이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건 떡볶이 가게와 돌솥비빔밥을 잘하는 조그마한 식당 같은 것들이다. 과일안주가 푸짐한 술집이라든지 비디오방의 네온사인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대충 계산해보면 제이와 내가 S여대 앞을 활보하던 시기는 어느 정도 겹치는 것 같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거리의 모습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만큼이나 다르다. 아마도 제이의 기억은 주로 낮과 관련된 것들이고 나의 기억은 밤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교복을 입은 제이가 낮에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 먹으며 놀다가 밤이 되어 집에 돌아가고 나면, 내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와 술집을 배회했던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S여대 앞에서 술을 마시던 시절의 내 모습은 정말이지 하이드 씨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당시에는 뭐가 그렇게 답답했는지 매일 밤마다 술을 마시며 돌아다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학이라도 접었다면 소원을 이뤄도 열 개는 넘게 이뤘을 것이다. 벌써 마을버스가 끊겼는데 택시 탈 돈은 없어서 비틀비틀 고개를 넘어 하숙방까지 걸어올 때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새벽바람이 차가워서인지 코끝이 찡해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난 주말에 제이와 S여대 앞 거리에 갔다가 돌아올 때도 그때 그 고갯길을 넘으며 걸어왔다. 천천히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우리 동네까지 올 수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날의 산책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당신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제이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글쎄. 아무래도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술 냄새를 풍기는 대학생을 좋아해 줄 여고생은 없을 것 같다. 떡볶이 체하지 않게 저쪽으로 돌아가렴.
“그때 날 봤으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거야.”
“당신이 어떻게 알아?”
“아무튼 지금 하고는 스타일이 많이 달랐거든.”
“그래도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는 거지.”
나는 거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스무 살 때와 비교해서 나라는 사람은 얼마나 변했을까. 일단 겉모습은 확실히 많이 변했다. 이제 더 이상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다거나 레몬 색으로 염색을 하지 않는다. 귀고리를 안 한지 오래돼서 귀를 뚫었던 자리에는 이미 새살이 돋았다. 거울에 비친 나는 머리를 깔끔하게 손질하고 주름이 잘 펴진 면바지를 입고 있다. 하지만 내 마음속 풍경들은 별로 바뀐 것 같지 않다. 여전히 바람이 많이 불고 가끔 비가 내린다. 맑은 날이 많지 않다. 제이는 그런 풍경들을 보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서 뭔가 좋아할 만한 구석을 발견한 것일까.
거기 비틀비틀 걸어가는 하이드 씨. 저는 당신이 무섭지 않아요.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는 법이거든요.
누구야? 하고 돌아보면 교복을 입고 있는 제이가 떡볶이 컵을 손에 들고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