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나는 줄곧 마른 체형이었다. 사슴뿔처럼 가느다란 내 손목을 볼 때마다 어른들은 남자 손목이 저래서는 안 되는데 하며 혀를 차곤 했다. 그래서 사춘기 때는 누가 내 손목을 보는 게 싫었다. 손목이 조금만 더 굵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워낙 다이어트가 유행하는 세상이다 보니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살은 빼는 것보다 찌우는 게 훨씬 더 힘든 것 같다. 어른들은 대학에 가면 금세 살이 찔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 군대에 가면 살이 찔 거라며 말을 바꿨다. 군대를 다녀와서도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자 나중에 결혼하면 그때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살이 붙을 거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과연 어른들의 말씀은 틀리는 법이 없어서, 결혼하고 이 년쯤 지나자 언제나 소나무처럼 한결같던 내 몸매에도 마침내 변화가 찾아왔다. 지난여름에 산 바지를 입으려고 하는데 단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바지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허리가 맞지 않았다.
“자기 배 나왔네.”
옷방에서 바지를 입었다 벗었다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던 제이가 한마디 했다. 듣고 보니 정말 이제 막 피자를 세 판 정도 먹어 치운 사람처럼 아랫배가 볼록하게 부풀어있었다. 내가 지금 배를 내밀고 있는 건가? 하지만 거울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정말로 배가 나온 것이다.
배가 나온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배만’ 나왔다는 것이었다. 다른 부분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손목 굵기도 그대로였다. 언젠가 SF만화에서 본 미래 인간처럼 가느다란 팔목에 아랫배만 볼록하게 나온 모습이었다. 처음 그 만화를 봤을 때나 지금이나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걸 진화라고 할 순 없어!
위기를 느낀 나는 동네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릴 때 잠깐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는 제이는 하루가 다르게 진도가 척척 나갔다. 하지만 목욕탕에 갈 때 말고는 물에 들어가 본 일이 거의 없는 나는 몇 달이 지나도록 기초반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함께 시작한 회원들은 빠르면 한 달, 늦어도 두 달 안에는 대부분 중급반으로 넘어갔는데 나만 계속 제자리였다.
“갈 사람은 빨리빨리 가라 그래. 우리는 천천히 즐기면서 하는 거지 뭐.”
언제쯤 저기로 갈 수 있을까 하며 중급반 레인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같은 반 할머니가 위로인지 격려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기초반의 터줏대감에게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서글펐다. 벌써부터 할머니가 말한 ‘우리’에 포함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할머니 역시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근데 우리는 그렇다 쳐도 그쪽은 젊은 사람이 좀 느리긴 하네.”
강습이 끝나면 저녁 아홉 시가 조금 넘었다. 수영 강습이 있는 날이면 우리는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동네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수영 가방을 어깨에 두르고 동네를 한 바퀴 걸었다.
“왜 하체가 자꾸 가라앉는 걸까?”
“발차기가 잘못돼서 그렇지.”
제이는 조금 전에 수영강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한다.
“뭐가 문제지?”
“힘을 빼야 돼, 힘을.”
역시 아까 수영강사가 했던 말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어떻게 힘을 빼냐고. 평생을 힘을 잔뜩 주고 살아왔는데.
집으로 돌아오면 자기 전까지 수영 동영상을 보며 자유형 발차기 연습을 했다. 침대에 엎드려 버둥거리고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제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옆에 와서 발차기 자세를 점검해주곤 했다.
“안 돼. 또 이렇게 힘이 들어가잖아.”
“두고 봐. 조만간 동대문구의 물개로 거듭나고 말 거니까.”
겨울이 되자 제이는 물에 들어가기 춥다며 수영을 그만두고 헬스로 전향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매일 밤 침대에서 버둥거리며 자유형 발차기를 연구하고 있었다. 코끝이 찡할 정도로 추운 겨울이 왔지만 나는 여전히 매일 저녁 결의를 다지며 수영 가방을 메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그 후로 벌써 두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그 사이 아랫배의 높이는 다시 원래대로 낮아졌고 수영 실력도 꽤 늘어서 이제 1km 정도는 쉬지 않고 헤엄칠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강습 첫날부터 강사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꾸준히 발차기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힘부터 좀 빼야겠다. 힘이 잔뜩 들어간 무거운 몸으로는 얼마 못 가서 지치고 말 것이다. 잠시 편안한 곳에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먼 곳을 한번 바라보자. 힘을 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