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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실력보다 오래 간다.

파리올림픽의 레이건과 아이들의 테니스 교실

by Kafka

오늘 테니스 레슨 전에 잠깐 시간이 남아 아이들 단체 레슨을 구경했다. 한국에서라면 눈에 불을 켜고 아이들의 자세를 고치고, 경쟁심을 북돋고,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자연스럽게 구분짓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여긴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아주 다르다.

코트 위에 있는 네 아이들은 모두 같은 코치에게 배우고 있었다. 배우고 있다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다. 교육이라기보단 놀이에 더 가까운 풍경. 분명히 한 아이는 확연히 못한다. 공을 치는 폼도, 반응 속도도 어설프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코치조차도. 그저 게임처럼 수업을 진행한다. 열 번을 쳐서 단 한 번 제대로 맞히기만 해도, “그레이트 샷!“이라며 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아이들은 정말로 행복해 보인다. 공을 줍는 시간조차 웃음으로 가득하다.

그 아이가 훗날 테니스를 그만두고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해도, 그는 아마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나 어릴 때 테니스 좀 쳤어. 레슨도 꽤 오래 받았고, 꽤 잘했지.”

그 기억은 사실보다도 단단하다. 반복된 칭찬, 즐거운 분위기, 자기 긍정의 분위기 속에서 쌓인 체험은 실력 이상의 자의식을 만들어낸다.

그 아이는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잘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잘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문득 파리올림픽 브레이킹 영상이 떠올랐다.

Raygun.

스프링클러 춤과 캥거루 점프가 뒤섞인 무대.

전 세계가 눈을 비비며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올림픽이라고?”

물론, 그녀는 당당했다.

“나는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움직임을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가끔은 실력이 없어도, 자신감만 있으면 예술이 되기도 하니까.

그녀는 나름 노력했고, 출전했고, 졌다.

결과는 혹독했다. 조롱, 밈, 음모론, 폭력적인 메시지들.

스코어가 잘 보여주듯, 그녀의 경기력은 실제로 기준에 못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질문은, 그녀가 왜 그 무대까지 갈 수 있었냐는 것이다.

호주의 브레이킹 씬은 작고 고립되어 있다.

국가적 지원도, 시스템도 미비하다.

레이건은 그 안에서 가장 ‘구성 가능한’ 얼굴이었고, 때마침 요구된 몇 가지 조건 — 회원 자격, 여권, 출전 이력 — 을 갖췄다.

그녀가 뭔가를 속였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녀의 자격이 진정 ‘실력’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구조적 공백에서 나온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이다.

이 나라에서는 착각은 죄가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생활방식이다.

모두가 기분 좋게 착각하는 사회.

못해도 칭찬, 져도 포용.

그 착각이 반복되면 ‘자격’이 된다.

이쯤 되면 묻고 싶다.

자격이란, 실력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걸까?

아니면, 실력 있다고 스스로 굳게 믿는 사람에게 더 쉽게 주어지는 걸까?

반면, 우리는 어땠나.

조금 부족하면, “감히 나가도 되나”를 고민했다.

자신감은 교만으로 오해받았고, 실수는 곧 낙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레이건’이 되지 못했다.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착각할 틈이 없었기 때문에.

호주의 방식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심지어 일정 부분 부럽기까지 하다.

기분 좋은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믿고, 심지어 세계로 나가는 그 용기.

이 얼마나 호주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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