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래된 부, 오래된 취향

서호주의 오래된 동네를 거닐다.

by Kafka

무언가 오래되었다는 건 단순히 오래 살아남았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시간의 흐름을 견뎌내었다는 뜻. 돈이 많다고 무조건 ‘잘 사는 동네’가 되는 건 아니다. 가끔은 갑작스러운 거대 자본의 유입이 동네의 결을 깨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된 잘 사는 동네는 다르다. 그곳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스스로 알고 있는 듯하다. 당연하게도, 이곳 서호주에도 그런 동네가 있다. 부촌이라 불리지만, 그 이름보다 더 오래된 건 삶의 방식이다. 빠르지 않고, 과시하지 않으며, 무언가를 ‘오래 즐기는 법’을 아는 사람들.

한적한 평일 오후, 우연히 들른 그런 동네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가게들을 발견했다.

먼저, 크루즈 여행사. 상가들이 늘어선 아케이드에 자리한 크루즈 여행사 안에는 실버 헤어 손님들이 상담 중이다. 크루즈는 저렴하지 않다. 일주일에 수천 달러가 기본이지만, 그걸 기꺼이 지불하고도 “어디가 좋았어?” 묻는 질문에 “음, 침대가 편했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렇게 여행은 더 이상 ‘발도장의 숫자’가 아니라 ‘쉬는 기술’이 된다.

그 거리엔 액자 전문점도 있다. 1년에 그림을 몇 점이나 사겠는가 싶지만, 그 가게는 여전히 영업 중이다. 오래된 수작업 테이블 위로 금박을 입힌 프레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주인은 느긋하게 차를 마신다. 액자를 맞춘다는 건 ‘이건 영원히 내 벽에 걸 거야’라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결정이 가능한 삶이라면, 그건 이미 충분히 여유로운 삶이다.

조금 더 걷다 보면 편집샵이 나온다. 로고 대신 소재와 재단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매장은 작지만 단단하다. 명품 로고를 겉에 드러내지 않지만, 태그를 보면 이 동네가 어디쯤인지 짐작이 간다. 단정하게 개켜놓은 옷, 오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직원의 미소. “알아보는 사람만 오세요.”라는 그들의 철학이 말없이 전해진다.

조금 더 걷다 보면, 화려한 표지판이 없는 오래된 악기점이 나온다. 피아노, 첼로, 색소폰이 천천히 수명을 이어가는 공간. 수리 중인 악기가 음악을 멈춘 것이 아니라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 악기점 주인은 악보에 연필로 표시를 하고 있었다. 대화는 필요 없다. 그저 조율 중인 현악기의 소리가 바람처럼 흘러나올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래된 서점. 들어서자마자 느낄 수 있다. 이곳은 책을 팔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서점 주인이 서가 사이에서 조용히 낮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평일 오후, 꽤 긴 시간 책을 구경하다 나왔는데도 “괜찮아요, 편히 보세요”란 말 외엔 아무 말도 없었다. 이 서점은 생계보다 취향에 가까운 가게다. 누군가의 ‘잘 사는 삶’이 진열된 공간.

이 동네를 걷다 보면 보이는 건, 지속가능한 취미와 자기만의 속도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삶을 효율로만 가늠하지 않는다. 돈으로 시간을 사는 대신, 시간을 스스로 쓸 줄 안다.

그건 결국, 자기 자신의 속도로 살고 있다는 증거.

그리고 그게, 내가 추구하는 ‘잘 사는 삶’의 본질이다.

요즘 꽤 많은 사람들이, 어느 공간을 방문하고 경험하면 사진을 찍고 어딘가에 후기를 남긴다. 나 역시 이 글이 결국 후기이자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이 거리에는 그런 디지털 흔적조차 닿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오래된 그림처럼, 소리 없는 무게를 가진 공간.

그게 진짜 ‘잘 사는 동네’의 비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기 삶을 타인의 기준 없이 오래도록 조율해 온 거리. 그리고 그 안에서 반딧불처럼 작은 빛을 내며 살아가는 사람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맨발로 걷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