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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무렵에 면도하기

제임스 본드와 하이네켄

by Kafka

내 첫 면도기는 중학생 시절, 아버지가 사설 게임장 뽑기에서 뽑아온 필립스 전기 면도기였다. 워낙 취미가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은 분이셨다, 그리고 한 번 빠지면 푹 빠지는 분이셨다 — 지금의 나처럼. 그 시절엔 동네마다 하나쯤은 있던 사설 게임장에 자주 들르셨고, 그곳 뽑기에서 내 첫 면도기를 얻어 오셨다. 방수는 안 됐지만 인체공학적 디자인에 3단 날까지 갖춘, 그 시절로선 제법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훈련소에서 처음 써본 날 면도기는 영 맞지 않았다. 결국 자대에 배치된 후, 중학교 시절 내게 주어졌던 그 오래된 필립스 전기 면도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방수가 되지 않는,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의 3단 날 면도기. 그때는 그저 신기했지만, 다시 손에 쥐었을 땐 왠지 모를 익숙함과 안도감이 있었다.

그 이후로 줄곧 전기 면도기만 써왔다. 호주로 이주한 뒤에도 여전히 필립스를 고집했다. 지금 쓰는 면도기도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 간다. 날만 가끔 갈아주면 큰 문제 없이 돌아가지만, 요즘 들어 부쩍 예전만큼 깔끔하게 밀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수염이 굵어진 걸까, 아니면 욕심이 많아진 걸까.

그래서일까. 요즘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브라운 시리즈 9.

바버샵에서 머리를 밀 때, 스킨페이드 작업을 위해 바버들이 들고 있는 트리머는 언제나 브라운 면도기를 닮았다. 단지 생김새 때문일까? 아니다. 그런 데엔 늘 이유가 있는 법이다.

면도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어느 호텔 스위트룸, 직접 폼을 내어 클래식한 싱글날 면도기로 수염을 정리하며 직장 동료이자 본드걸인 여인과 나누던 짧은 대화.

왜 그렇게 오래된 것을 고수하느냐는 물음에, 본드는 묵직한 시선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흔들고, 휘젓지 않은 마티니를 마시던 남자.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하이네켄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대는 변하고, 본드도 변한다.

질레트 면도 크림과 최신 브라운 면도기를 쓰는 제임스 본드라니.

물론 그런 장면은 없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작품에서 실제로 그런 걸 쓴 적도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일 뿐이고, 핑계가 되기엔 좀 약하다.

하지만—사람이 뭔가를 새로 사고 싶을 땐, 그 정도 상상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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